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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1. 이 인물은 철학자이자 문필가이고, '패러독스'로 유명한 수학자이다. 그가 펴낸 《수학 원리》는 수리철학과 기호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열었다. 그는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를 예로 들어 '기술 이론'을 세운다. 또한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버트런드 러셀 [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
잉글랜드 만머스셔에서 태어났다. 명문 귀족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한때 동대학 강사로 근무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운동(反戰運動)이 화근이 되어 대학에서 쫓겨났고, 1918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유럽 각국과 러시아·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대학 강의를 맡으며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논리학자로서 고틀롭 프레게(Gottlob Frege)의 업적을 계승했고 주세페 페아노(Giuseppe Peano) 등의 영향을 받았다. 리하르트 데데킨트(Richard Dedekind),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 등이 남긴 현대수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삼아 19세기 전반에서 비롯된 기호논리학의 전사를 집대성했고, 앨프리드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와 함께 《수학원리》(3권, 1910∼1913)를 저술했다. 논리의 개념이나 연산을 이용해 전체 수학을 도출했고, 수학적 대상을 실재로 간주하는 논리주의를 구상했으며, 이를 실수(實數) 도출에도 적용했다. 이외에 집합론 역리(逆理)의 발견, 그것의 해결을 꾀하는 계형이론(階型理論), 환원의 공리(公理), 기술이론(記述理論) 등 다양한 창의에 따른 성과를 남겼다. 이러한 여러 이론이나 논리주의 구상은 이후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을 비롯한 여러 학자가 부정하거나 수정했지만, 이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과 의의는 지금도 유효하다.
철학자로서 버트런드 러셀의 성과는 이론철학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등과 함께 케임브리지학파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도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해 실재론을 주장했다. 다만 시대에 따라 다른 입장을 보였는데, 한동안 영국 헤겔학파의 영향 하에 놓이거나 마이농류(流)인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의 경향도 보인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 ·존재론의 일반적인 경향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논리를 소재(素材) 방법으로 삼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 고유의 경험론의 전통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논리적 원자론'이라는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실재의 이론적 단위를 설정하여, 그것으로 환원하거나 그것을 분석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훗날 영국 철학이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윤리학자로서 처음에 그는 조지 에드워드 무어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으나, 후에 논리실증주의자의 정서설(情緖說)에 가깝게 입장을 바꿨다. 또한 사회사상가로서 케임브리지대학교 졸업 직후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조우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방문해 혁명지도자와 혁명 후의 실정을 접하고는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의 경향은 서구적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로써 정치이론도 과학이론과 같이 이데올로기나 광신적 독단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한편 실천가로서 1907년 하원의원으로 입후보했지만 낙선했고, 1920년대 일반대중을 위한 다수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BBC 방송 출연 등으로 유명해졌으나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1960년 ‘100인 위원회’를 구성해 핵무장 반대 연좌농성을 이끌어 네번째 부인과 함께 금고형을 받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자로서 긴 경력을 쌓으면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고, 유연한 입장 변화를 보였다. 기호논리학의 수법으로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시도와 성과는 20세기 철학에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대표 저서로는 상기한 것 외에도 《외계의 지식》(1914) 《수리철학 서설》(1919) 《정신의 분석》(1921) 《물질의 분석》(1927) 《의미와 진실의 탐구》(1940) 《서양 철학사》(1945) 《자서전》(3권, 1969) 등이 있다.
#철학자
2. 이 인물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현실ㆍ원리의 조화와 실공(實功)ㆍ실효(實效)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했으며, <동호문답>ㆍ<만언봉사>ㆍ<시무육조> 등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이이 [李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4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하여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자경문은 입지(立志)·과언(寡言)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과에 급제한 1564년에 정6품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 관직에 나선 뒤에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좌랑을 거쳐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의 대간(臺諫)의 직위에 있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569년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로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정철(鄭澈)과 함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0년(선조 3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571년 청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 율곡촌(栗谷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1573년(선조 6)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했으며, 1574년(선조 7)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그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관직에 올랐고, 그 뒤 대사헌(大司憲),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75년(선조 8) 선조에게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제출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으며, 1580년에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社倉)을 실시하기도 했다.
1581년 대사헌과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겸임하며 다시 관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1582년에 이조판서,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 음력 1월 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파주 자운산의 선영에 묻혔으며, 1624년(인조 2)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성혼(成渾)과 함께 공자(孔子)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우리나라의 명현(名賢)으로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연일기(經筵日記)>, <천도책(天道策)>, <역수책(易數策)>, <문식책(文式策)>, <격몽요결(擊蒙要訣)>, <만언봉사(萬言封事)>, <학교모범(學校模範)>, <육조계(六條啓)>, <시폐칠조책(時弊七條策)>, <답성호원서(答成浩原書)> 등이 있으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611년(광해군 3) 박여룡(朴汝龍)과 성혼(成渾) 등이 간행한 <율곡문집(栗谷文集)>과 1742년(영조 18)에 이재(李縡)와 이진오(李鎭五) 등이 편찬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전해진다.
#철학자
3. 이 인물은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이는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며(無爲),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自然)고 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장자 [莊子]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사상】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 ·지역 ·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 ·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한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 ·가라지 ·기왓장 ·똥 ·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한다. 물(物)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수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老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영향】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야학(般若學)과 당나라 때 융성한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종(玄宗)은 그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송(宋) ·명(明) 이학(理學)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에 이단(異端)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산림(山林)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4. 이 인물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다.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S.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을 입증하고, ‘콤플렉스’라 이름붙였다.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우고 성격을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나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1875년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의사와 종교인이 많았으며 바젤에서 명망있는 집안에 속했다. 융의 할아버지는 의사였으며 바젤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바젤 지역의 개신교 목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의 부친(파울 아힐레스 융)은 스위스 개신교 교회의 목사였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머니(에밀리 프라이스베르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융이 태어나기 전 계속된 사산으로 우울증을 앓았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자주 머물면서 융은 어려서부터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되면서 어머니의 관심과 영향 속에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자신이 돈벌이와 학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청년기에는 바젤 후마니스티셰스 김나지움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 아버지가 정신병원 상담 목사로 활동하면서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95년 바젤대학 자연과학부에 입학하여 해부학, 생물학 등 의학공부에 필요한 과정을 배웠으며 정신의학을 전공분야로 선택했다. 그가 정신의학을 선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크라프트 에빙의 저서들이라고 회고했다. 1900년 12월 졸업한 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1857~1939)를 보조하는 보조의사이자 연구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활발하게 정신의학을 연구하였다. 한편 1903년 IWC 상속녀인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하였으며 엠마는 그의 비서이자 연구를 돕는 내조자로 충실하게 역할하였다.
1904년경 정신병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단어를 통한 연상실험을 창시하였다. 그는 단어연상법으로 S.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통해서 제기한 억압된 것, 즉 억압이론을 입증하고, 그것을 ‘콤플렉스’라고 이름붙였다. 1906년 조현병(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07년 융은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있는 프로이트를 찾아가 교류하면서 서로의 연구에 공감하며 친분을 나누게 되었고 자신의 연구업적들에 의해 프로이트의 두터운 신뢰와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후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융과 부르크흴츨리 병원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08년 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 제창자가 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행하기로 결정한 기관지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연구연보》의 편자(編者)로 뽑혔다. 1909년에는 미국 보스턴 클라크대학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트와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하였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의견이 대립되어,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 이후 자신의 심리학(분석심리학이라 일컬음)을 수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의 심리학은 신비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데다 난해하였기 때문에, 심리학 일반에 대해서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나 인간의 유형을 ‘외향형(外向型)’과 ‘내향형(內向型)’으로 나눈 유형론(Typology)은 그의 큰 공적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외향적 기질과 내향적 기질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어느한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유형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1961년 6월 6일 색전증으로 사망했다. 대표적인 저서에 《심리유형론》(1920) 등이 있다.
#철학자
5. 이 인물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이다. 미네소타·미시간·시카고·컬럼비아 각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서민의 경험을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소화하여 보편적 교육학설을 창출하여 세계 사상계에 기여하였다. 대표적 저서로는《논리학-탐구의 이론》, 《경험으로서의 예술》 등이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존 듀이 [John Dewey]
버몬트주(州) 벌링턴 출생. 버몬트대학교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미네소타·미시간·시카고·컬럼비아 각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컬럼비아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차 W.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에 끌려,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또는 인스트루멘털리즘(도구주의)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의 《논리학적 이론의 연구》(1903) 《실험적 논리학 논문집》(1916) 《사고의 방법》(1933) 등에 의하면, 모든 사고(思考)는 혼탁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명확한 상황으로 개조(改造)하는 노력, 다시 말하면 ‘탐구(探求)’인 것이다. 관념이란 이를 위한 실험적인 가설(假說)이며 도구이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이것은 오렌지의 일종이 아닐까 하고 잘라 보고 맛봄으로써 오렌지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실험적인 가설로서의 관념은 상황을 개조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의 좋고 나쁨이 잘 드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듯이, 관념의 좋고 나쁨(진위)은 상황을 개조할 수 있는지의 유효성(有效性)에 의하여 판정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논리학은 모든 분야에서의 탐구 규범과 반성적 사고를 분명히 함으로써 앞으로의 탐구를 보다 더 유효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학―탐구의 이론》(1938)을 저술하였다. 또한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에 의하면, 경험은 인식(認識)의 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반성이 가미되기 전에 느껴지며 살아 있는 것으로서 널리 해석된다. 인간생활은 혼탁하고 불확정(不確定)한 경험에서 통일적인 경험으로 이행하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전자에서 후자에 이를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와 충족감이 주어진다. 이러한 이행(移行)의 달성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적인 작용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교육에 대해서는 《학교와 사회》(1899) 《민주주의와 교육》(1916)에 의해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改造)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반대로 학생들의 자발성(自發性)에만 의존하면 불충분하므로 여러 가지 경험에 참여시킴으로써 창조력을 발휘시킬 수 있는 계획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학교는 현실사회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사회개조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이상사회로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92세라는 그의 생애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고, 미국이 최대강국으로 부상한 시대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무너져가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제퍼슨과 링컨의 고전적인 이상을 새로이 개조하고, 서민의 경험을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소화하여 보편적 교육학설을 창출하여 세계 사상계에 기여하였다. 1932년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 1939년 중국에서 제이드 훈장, 1949년 칠레에서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튀르키예·러시아 등을 방문하여 교육혁명을 지도하였다. 1946년 87세에 42세인 로버타와 재혼, 1952년에는 뉴욕주(州) 자유당 명예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그의 이상을 배반하고 힘과 금력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여기에 그의 사상의 비극적인 성향이 있다.
#철학자
6. 이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 ·수학자이다. 처음에 수학적 논리학(기호논리학) 연구에 종사하였고, B.러셀과의 공저 《수학원리》를 저술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확립하려 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 Alfred North Whitehead ]
램즈게이트케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1885∼1911년 동 대학의 강사, 1914∼1924년 런던대학 교수, 1924∼1937년 미국 하버드대학 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처음에 G.W.라이프니츠, L.A.쿠튀라, H.G.그라스만 등의 영향하에 수학적 논리학(기호논리학) 연구에 종사하였고, B.러셀과의 공저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3권, 1910∼1913)를 저술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확립하려 하였다.
이어 근대의 새로운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를 고찰하여 《자연인식의 제원리(諸原理)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1919) 《자연의 개념 The Concept of Nature》(1920) 《상대성 원리 The Principle of Relativity》(1922)를 집필하여 사상(事象:event)’의 개념을 사용해서 자연에서의 모든 사상 상호간의 확급(擴及) 및 상입(相入)의 원리를 구명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자연과학에서도 항상 경험과 구상성(具象性)을 존중하고, 사변적(思辨的) ·추상적 태도를 배척하였다.
도미(渡美) 후의 저서 《과학과 근대 세계 Science and Modern World)》(1925) 《관념의 모험 Adventures of Ideas》(1933)은 유기체(organism)’의 개념을 중핵으로 하는 그의 발전적 ·창조적 형이상학을 전개한 것이다. 그 밖의 주요저서에는 《보편대수학(普遍代數學) A Treatise on Universal Algebra》(1898) 《상징주의 Symbolism》(1928) 《과정과 실제 Process and Reality》(1929) 《이성(理性)의 기능 The Function of Reason》(1929) 《자연과 생명 Nature and Life》(1934) 등이 있다.
#철학자
7. 이 인물은 독일의 철학자이다. 《산술의 철학》에서 수학적 인식을 지향하면서도, 한편 심리주의적 경향을 취했다. 뒤이은 《논리학 연구》에서는 순수논리학, 논리주의적 현상학을 지향했다.《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여러 고안》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다 . 1911년에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 출간되고, 나치에 의해 사라질뻔한 그의 원고들은 《○○ 전집》으로 묶여 출간된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
체코 프로스테요프 모라비아 프로스니츠 출생. 라이프치히대학교 ·베를린대학교 ·빈대학교에서 수학 ·철학을 공부하였다. F.브렌타노의 영향을 받은 후 할레비텐베르크대학교 강사를 거쳐 1901년 괴팅겐대학교 조교수, 1906년 동대학 교수, 1916∼1928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처녀작 《산술의 철학 Philosophie der Arithmetik》(1891)에서는 수학적 인식의 기초를 잡을 것을 지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취하고 있었으나, 뒤이은 《논리학 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2권, 1900∼1901)에서는 순수논리학, 논리주의적 현상학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1907년 괴팅겐대학교 강의에서, 처음으로 이 현상학적 환원(還元)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현상학적 환원으로 도출(導出)된 ‘순수의식의 직관적인 본질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이념은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Philosophie als strenge Wissenshaft》(1910∼1911)을 거쳐 《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여러 고안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1913)에 이르러 대체적인 완성(完成)을 보았다.
그후 《데카르트적 성찰 Cartesianische Meditationen》(1931)에서는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더 나아가 《유럽 여러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1936)에서는 일체의 인식이 성립되는 궁극의 장(場)으로서의 ‘생세계(生世界:Lebenswelt)’의 문제가 논술되는 등, 후설의 사상은 그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 나갔다. 그 양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간행되기 시작한 유고집(遺稿集)에 의하여 밝혀졌으며, 그와 더불어 근래에는 ‘후설 르네상스’의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현상학은 시대의 사상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철학자
8. 이 인물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이다. 배청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에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론을 전개하였으며, 중상주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허생전>, <연암집> 등이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박지원 [ 朴趾源 ]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철학자
9. 이 인물은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주자 [Zhu Xi, 朱子]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婺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瑳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철학자
10. 이 인물은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오늘날 사상계를 풍미하는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제네바대학교 교수를 지냈다.《인도유럽어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으로 유명하고, 저서는《일반언어학 강의》(1916)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페르디낭 드 소쉬르 [ Ferdinand de Saussure ]
제네바 출생. 1901∼1913년 제네바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라이프치히대학교 재학 중인 21세 때 《인도유럽어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1879)을 저술하여 당시 학계에서 지극히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던 이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학계의 냉대를 받았으나, 파리에서는 대단한 호응을 받았으며, 브레아르의 뒤를 이어 고등연구소의 강사가 되어 비교문법을 강의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인 제네바로 돌아가 일반언어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소쉬르가 제네바대학교에서 행한 강의를 학생들이 필기한 노트와 그의 초고를 대조하면서 두 제자인 샤를 바이와 알베르 세시에가 편찬한 것이 《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1916)이다. 이 책 속에 결정(結晶)되어 있는 그의 언어이론, 즉 언어 활동에 있어서의 언어와 말의 구별, 공시태(共時態)와 통시태(通時態)의 구별, 기호학으로서의 언어학, 그리고 대립의 법칙 등의 이론은 점차 학계의 일반적 승인을 받게 되었다. 소쉬르는 오늘날 사상계를 풍미하고 있는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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