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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인물퀴즈

[010]철학사상가 인물 퀴즈 모음 #06 (난이도 있는 인문학 인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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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1. 이 인물은 분석철학에 큰 기여를 한 철학자다. 그는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를 통해 당시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던 '언어'를 다뤘다. 그는 책에서 신, 자아, 도덕 등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상 언어학파'와 '일상 언어학파'는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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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비트켄슈타인은 비엔나에서 유대계 오스트리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오스트리아 철강산업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은 부유하고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비트켄슈타인은 14세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다가 린츠(Linz)에서 3년간 학교를 다닌 뒤, 베를린(Berlin)에서 공학을 공부하였다. 1908년 맨체스터(Manchester)대학교에 연구생으로 등록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제트반사 항공기 엔진을 설계하였다. 프로펠러를 설계하는 동안 그의 관심은 공학에서 수학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수학의 철학적 토대로 바뀌었다. 청년 시절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을 읽은 뒤 작품의 관념론 철학에 영향을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러셀(Russell)의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를 통하여 프레게(G. Frege)의 실재론적 수학철학을 알게 되었다.

1912년부터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Cambridge Trinity)대학에서 러셀의 지도 아래 5학기를 보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철학자 무어(G. Moore)와 경제학자 케인즈(J. Keynes)와 사귀었다. 군 복무 기간에는 자신의 철학사상을 배낭 속에 넣어 다니던 수첩에 기록했는데, 이 글의 대부분은 1950년 그의 지시로 없애 버렸다. 그러나 세 편이 남아 사후에 출판되었다. 또한 이 메모에서 그가 생전에 출판한 유일한 철학 책인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이 탄생하였다. 그는 자신의 수첩에서 최고의 사상들을 골라내어,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다시 정리하면서 그 책을 집필하였다. 그가 예비로 정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최근에 발견되어 『원논고』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논리철학론』(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g)의 2천 단어는 한나절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수년 동안 연구를 한다고 하여도 그것을 완전하게 이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책은 정상적인 방식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번호가 매겨진 일련의 문단으로 되어 있는데, 그 문단들은 단일한 한 문장 이상을 포함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문단 2개는, "세계는 사례들의 총체다."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이다. 어떤 문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말로 바꾸는 것보다 음악으로 바꾸거나 조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문단의 표현은 간결하고 단순하여 수식이 없고 예가 적다. 많은 부분이 언어의 본성과 언어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을 통한 철학적 주 관심사였다.

그것이 전하는 중심 이설은 '의미의 그림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를 그리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제들은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이며, 사고는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명제와 사고는,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림이다. 1930년 초는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에서 가장 다작을 했던 시기인데, 2권의 저서 『철학 논평(Philosophical Remarks)』과 『철학 문법(Philoso- phical Grammar)』을 썼지만 출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책에서 『논고』의 특징적 이설 몇 가지를 철회하였다. 또한 1939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상언어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였다. 이후 1953년에 출간한 『Philoso- phische Untersuchungen』로 일반 철학계는 케임브리지 강의실 밖에서 발전한 철학과 개인적으로 유포된 노트들의 내용을 직접 알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어느 특정한 철학 학파에 소속된 적이 없었고, 당대의 유행 사조를 경멸하였다. 그러나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하나의 새로운 사상공동체를 창조하였다. 그는 최소한으로 책을 출판했고, 어떤 식으로든 대중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분석철학계(分析哲學界)에 그가 끼친 영향은 크다. 그의 사상은 중·후기로 옮겨 가면서 사상적 변화가 나타났고, 언동도 점차 신비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그의 철학은 형이상학적인 깊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철학자

2.  이 인물은 20세기의 유명한 '실존철학자'다. 그는 평생 '존재'에 대한 연구를 했고, 스스로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존재' 자체에 대해 탐구한 《존재와 시간》으로 유명해졌다. 강단에서 은퇴한 후에는 노자의 무위자연이나 불교의 해탈과 비슷한 사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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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마르틴 하이데거 [ Martin Heidegger ]

 

20세기 독일의 실존철학을 대표한다. 1889년 9월 26일 바덴주(州) 메스키르히에서 출생하였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E.후설에게 현상학(現象學)을 배웠다. 1923년 마르부르크대학교 교수, 1928년 후설의 뒤를 이어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교수, 1933∼1934년 총장을 지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스에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전후에 한때 추방되었다. 후에 다시 복직하여 강의를 하였지만, 전전·전후를 통틀어 그의 사색의 대부분은 슈바르츠발트의 산장(山莊)에서 이루어졌다.

하이데거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주요 저서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1927) 때문이며 이것은 전체 구상의 전반부(前半部)에 해당하며, 처음에 후설이 편집하는 현상학에 관한 연구연보(硏究年報)에 발표되었다. 여기에서는,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현존재)의 존재(실존)가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주제가 되고,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규정인 '관심'의 의미가 '시간성'으로서 확정되는 데서 끝맺고 있다.

그는 거기에서 《존재와 시간》의 본래의 주제인 '존재'와 '시간'의 관계로 되돌아가 현존재의 시간성(時間性)을 실마리로 해서 존재의 의미를 시간에 의하여 밝히는 동시에 역사적·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역시 시간적인 지평(地平)에서 구명(究明)할 예정이었으나, 이 후반부는 미발표로 그쳤다.

즉, 그가 실존사상의 대표자로 간주된 것은, 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 부분 때문이며, 여기에서는 불안·무(無)·죽음·양심·결의·퇴락(頹落) 등 실존에 관계되는 여러 양태(樣態)가 매우 조직적·포괄적으로 논술되었다.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과거·현재·미래의 삼상(三相)의 통일인 시간성으로서 제시된 것도, 인간이 시간적·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삶의 철학' 이래의 사상을 실존의 시점(視點)에서 다시 포착한 것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의 현존재 분석의 수법은 정신분석에서 문예론(文藝論), 더 나아가 신학(神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1935년 전후를 경계로 해서 하이데거의 사색은 존재 그 자체를 직접 묻는 방향으로 향한다. 존재는 개개의 존재자와 동렬(同列)에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들을 저마다의 존재자로 존재하게 하는 특이한 시간·공간이며, 인간은 거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개존(開存:Eksistenz)'이다. 서양의 철학은 예로부터 존재를 존재자로서 파악하는 '형이상학'인 것이며, 거기서부터 하이데거의 역시 특이한 사관(史觀)이라 할 수 있는 존재사관이 탄생한다.

존재자를 인간의 객체로서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인간중심적인 '폐존(閉存:In-sistenz)'의 입장은 이 형이상학에, 즉 존재의 망각(忘却)에 유래한다. 현대에 필요한 한 가지 일은, 형이상학의 역사적 유래를 앎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존재 그 자체에 청종(聽從)하면서 그것을 지키고 간직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존재의 사색이 《존재와 시간》의 목표였던 존재 그 자체의 해명과 연속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인간 본연의 자세에 대한 견해가 변화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런 의미에서는 후기(後期)의 하이데거를 이를테면 J.P.사르트르 등과 동렬의 실존주의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 밖에 주요 저작으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 《휴머니즘에 관하여 Ü ber die Humanismus》(1947), 《숲 속의 길 Holzwege》(1950), 《휠데를린의 시(詩)의 해명》(1950), 《니체》(1961) 등이 있다.


#철학자 #소설가

3. 이 인물은 프랑스의 소설가·철학자이다.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여 칭송을 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 희곡 《칼리굴라》 등을 통해 부조리한 인간과 사상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소설 《페스트》 등의 작품을 남겼다.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인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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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년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프랑스인 아버지와 스페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알제리 출신 프랑스계 이민자로 태어났다. 카뮈는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아버지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자 빈곤 속에서 성장했다. 17세 때 발병한 폐결핵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고학과 그의 재능을 인정한 철학자인 장 그르니에 교수의 영향을 받아 1935년 알제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지원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군 점령하에 있는 프랑스에서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한편, 카뮈는 1942년 <이방인(L'Etranger)>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에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전쟁과 부조리로 가득해 의미 없는 세상에서 '죽음만이 인생의 목적'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삶이 의미 있음을 역설하였고, 같은 해 발표한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통해 그의 '부조리에 대한 사상'을 설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 저항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종전 이후인 1947년에는 <페스트>를 발표하였다. 또 1948년 이 작품을 극화하여 <계엄령>을 쓰기도 했다. 그는 <칼리굴라(Caligula)>(1945), <페스트(La Peste)>(1947) 등의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인간과 사상으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였다.

당시 카뮈는 장 폴 사르트르와 교우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차이로 결국 소원해졌다. 그는 공산주의를 철학적으로 반대하는 <반항하는 인간>을 내기도 했고, 시사평론가로서 당대의 현안에도 활발히 개입했으며, 1950년대에는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단두대에 관한 성찰>로 44세 나이의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최연소의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3년 뒤 새로운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의 구상을 마쳤으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철학자, 정치가

4. 이 인물은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이다.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저서는《목민심서》,《경세유표》등이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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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정약용 [丁若鏞]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 호는 다산. 남인에 속하였으며 천주교를 연구하였다. 거중기를 고안하여 수원성 축조에 기여하였다. 1801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신유박해 때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사건으로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간 학문에 몰두하며 유배 생활을 하였다. 토지 개혁에 관심을 보여 마을 단위로 공동 생산하여 노동력에 따라 수확량을 공동으로 분배하는 여전제를 구상하였으며, 백성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지급하여 자영농 육성을 추구하는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또한 서학을 통해 합리적인 과학 지식을 도입하려고 하였다.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자 실학이 쇠퇴하였고 남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저서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이 있다. 


#사상가 #종교인

5. 이 인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이다.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였다. 충남 강경에 잠입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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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김대건 [金大建] 

 

성인. 본관 김해.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 재복(再福)·보명(譜名)·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牛江面)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고, 아버지 제준(濟俊)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는 등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內四面)으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Maubant)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 전교(傳敎)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를 배웠다. 1842년 수업을 끝낸 다음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시도하였다.

처음 의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다가 감시가 심하여 되돌아갔고, 얼마 후 페레올 주교로부터 고국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번에는 두만강변 경원을 거쳐 입국하려다가 또 실패하고, 바쯔자[八家子]로 돌아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1845년(헌종 11)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 천주교 대탄압 이후 위축된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다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執典)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하여, 서울을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하여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후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26세로 순교, 경기 안성시 양성면(陽城面) 미산리(美山里)에 안장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안장된 곳은 미리내 성지로 불리워지며, 이윤일 요한 성인과 16위 무명선교자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1857년(철종 8)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시복(諡福)되어 복자위(福者位)에 오르고 1984년 4월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 시성(諡聖)되어 성인위(聖人位)에 올랐다.

2019년 11월 유네스코에서는 2021년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철학자 

6. 독일 출생의 미국 철학자,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자이다. 과학 철학론을 추진하다가 나치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 시카고 대학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형이상학을 배척하고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신택스의 분석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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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루돌프 카르납 [Rudolf Carnap] 

 

독일 론스토르프 출생. 1926∼1931년 당시 논리실증주의의 아성(牙城)인 빈 대학교에서 철학교수를 역임하였다. 1930년부터 《인식(認識)》지(誌)를 주재(主宰)하여 과학 철학론을 추진하다가 나치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 시카고 대학교(1936∼1952) 및 캘리포니아 대학교(1954∼1961) 교수를 지냈다.

그는 다른 논리실증주의자들처럼 형이상학(形而上學)을 배척하고,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신택스의 분석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후기에는 의미론(意味論) 분야로 전향, 기호(記號)와 그 표시(表示)와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그 후 일상 언어학파의 비판을 받아 현재는 분석철학자 모두가 그의 입장을 신봉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재구성학파(再構成學派)의 거성(巨星)으로 그의 지위는 확고하다. 주요저서로는 《세계의 논리적 구축 Der logische Aufbau der Welt》(1928) 《언어의 논리학적 신택스 Logische Syntax der Sprache》(1934) 《의미론 서설 Introduction to Semantics》(1942) 《의미와 필연성(必然性) Meaning and Necessity》(1947) 《개연성(蓋然性)의 논리적 기초》(1950)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 Philosophical Foundation of Physics》(1966) 등이 있다.


#철학자 

7. 이 인물은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E.후설의 후기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활세계의 현상학적 기술(記述)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기도한 저서 《지각의 현상학》를 썼다. 사르트르, S.de 보부아르 등과 더불어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이론가가 되었다. 나중에 용공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하게 된 사르트르와 사상적으로 결별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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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라 로세르 근처 로쉬포르 쉬르 메르 출생.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사범대학)를 졸업, 여기에서 J.P.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1945년 리옹, 1949년 소르본대학을 거쳐 1952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E.후설의 후기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활세계의 현상학적 기술(記述)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기도한 주저 《지각의 현상학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1945)에 의하여, 사르트르, S.de 보부아르 등과 더불어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이론가가 되었고, 실존주의적 양의성(兩義性)의 입장이 철저해졌다.

그의 주저는 신체 ·지각을 중심으로 주체와 객체, 나와 남의 문제를 논하였고, 사르트르와 같이 대자(對自) ·즉자(卽自)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불가분의 통일 속에 포착하려고 하는 양의성을 내세웠다.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트르에 앞서 공산주의자에게 동정을 표하였다. 그러나 한층 더 용공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하게 된 사르트르의 철학을 울트라볼셰비즘이라고 단정, 비판하며 비공산주의로 전환하고, 《변증법의 모험》(1955)에서는 사르트르를 신랄하게 비난하여 사상적 결별을 고하였다. 저서로는 《행동의 구조 La Structure du comportement》(1942) 《휴머니즘과 테로르》(1947) 등이 있다.


#철학자

8. 이 인물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웠던 사상계의 '제임스 딘'이라고 할 만한 철학자다. 그는 《존재와 무》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남긴다. 또한 그는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참여의 중요성 즉, 앙가주망을 깨닫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 대항하는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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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장 폴 사르트르 [ Jean-Paul Sartre ]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외조부 C.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나병 환자의 구제사업을 벌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A.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다녔는데, 동급생 중에는 M.메를로 퐁티, E.무니에, R.아롱 등이 있었다.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소년시절부터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된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해후도 그 때의 일이다.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후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루아브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이 포구는 후일 《구토 La Nausée》(1938)에서 묘사된 부비르라는 도시의 모델이라 한다.

1933년 베를린으로 1년간유학, E.후설과 M.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저서 《자아의 극복 Transcendance de l’Ego》(1934) 《상상력 L’Imagination》(1936)은 당시 사르트르의 현상학에 대한 심취가 낳은 철학논문이다. 1938년에는 소설 《구토》가 간행되었는데, 존재론적인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한 듯한 이 작품의 특수성은 세상의 주목을 끌어 신진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1939년 9월 참전하였다가 이듬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1941년 수용소를 탈출, 파리에 돌아와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장편소설 《자유의 길 Les Chemins de la liberté 》(1945∼1949)의 대부분과 《시튀아시옹 Situations》(1947∼1965)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도 전시하의 산물이었으나, 특히 1943년에 발표한 대작 철학논문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1943)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서 결정적인 작업이었고, 세계적으로 보아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중부터 전후에 걸친 그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웅대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노작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 등의 협력을 얻어 《레탕모데른 Les Temps Modernes》지(誌)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에서 밝혀 두었는데, 그가 말하는 ‘문학자의 사회 참여’란 그 이전의 《구토》나 《존재와 무》에서 볼 수 있었던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세계관과의 사이에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는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사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는 이른바 ‘사회참여’ 사상으로 일관해온 것이라 하겠으나, 특히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그는 그 때까지의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욱 경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생 주네 Saint Genet》(1952)는 《도둑 일기》의 작가 주네의 평전(評傳)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은 그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 주는 노작인데,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동맥경화증에 빠져 있는 양상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기모순적인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오래 전부터 친교를 맺어 왔던 친구들이 계속하여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카뮈와도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도 많은 극작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 《파리 Les Mouches》(1943) 《출구 없음 Huis-clos》(1944) 《무덤 없는 사자 Mort san sépulture》(1946) 《더럽혀진 손 Les Mains sales》(1948) 《악마와 신 Le Diable et le Bon Dieu》(1951) 《알토나의 유폐자들 Les Séquestrés d’Altona》(1959)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 때마다 사르트르의 사상을 현상화한 것으로 주목된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철학자

9. 이 인물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그는 벤담을 존경했지만, 양보다는 질이 높은 쾌락을 중요시하는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또 하원 의원에 당선돼 남녀평등과 노동자의 권리와 평등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주장을 했고, 이러한 정치적 입장을 《자유론》으로 펴냈다. 그는 언론가로서, 개혁적인 정치가로서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치사상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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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존 스튜어트 밀 [ John Stuart Mill ]

 

영국 런던의 펜톤빌(Pentonville)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과 플레이스(Francis Place, 1771~1854) 등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았는데, 세 살 때에 그리스어를 배워 여덟 살 이전에 이솝 우화와 헤로도투스의 <역사>, 플라톤의 <대화편> 등을 그리스어로 읽었다. 여덟 살부터는 라틴어와 기하학, 대수학을 배워 오비디우스(Ovidius), 투키디데스(Thucydides) 등의 고전을 폭넓게 읽었다. 열두 살부터는 논리학을 공부했으며, 열세 살에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와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등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열네 살 때에는 제레미 벤담의 동생 사무엘 벤담(Samuel Bentham, 1757~1831)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일 년을 보냈는데, 몽펠리에(Montpellier) 대학에서 화학, 동물학, 논리학 강의를 들었고, 고등수학을 배웠다. 파리에서는 경제학자 세(Jean-Baptiste Say, 1767~1832)의 집에 머무르며 사회주의 사회개혁가인 생 시몽(Saint-Simon, 1760~1825) 등을 만났다. 그리고 1820년대 초반부터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와 서신으로 교류하며 실증주의 사상의 체계화에도 기여하였다. 밀은 이후에도 콩트(Comte)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1865년에는 <오귀스트 콩트와 실증주의(Auguste Comte and Positivism)>를 저술하는 등 영국 사회에 실증주의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밀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를 제안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열일곱 살 때인 1823년부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에서 근무를 시작해, 1858년까지 36년 동안 재직하며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밀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공리주의 사상과 정치경제학, 논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할 수 있었으나, 20대에 들어서면서 흥미와 의욕이 감퇴하는 등 정신 건강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스물한 살 때에 그는 극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렸는데,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시와 마르몽텔(Jean-François Marmontel, 1723~1799)의 작품 등에서 위안을 얻었다. 특히 스물네 살 때인 1830년, 해리엣 테일러(Harriet Taylor Mill, 1807~1858)를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정신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해리엣 테일러는 남편인 존 테일러(John Taylor)와 함께 자유주의적인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활동을 하였으며,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지니고 여성의 참정권 운동 등을 벌였다. 밀은 해리엣 테일러와 지적인 교류를 하며 우정을 쌓았다. 그리고 남편을 잃고 혼자된 해리엣 테일러와 1851년 결혼하였다. 그녀는 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론(On Liberty)>(1859)과 <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1969) 등은 해리엣 테일러의 직접적 영향으로 저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해리엣 테일러는 1858년 밀과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아비뇽(Avignon)에서 폐출혈로 사망했다.

밀은 1865년부터 1868년까지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 대학의 학장으로 재임하였고, 같은 기간 동안 런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는 1866년 최초로 의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으며, 비례대표제와 보통선거권의 도입 등 의회와 선거 제도의 개혁을 촉구했다. 또한 노동조합과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과 아일랜드의 부담 경감 등도 주장하였다.


#사상가 #종교인 

10. 이 인물은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로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儒)ㆍ불(佛)ㆍ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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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최제우 [ 崔濟愚 ]

 

동학의 창시자이며, 호는 수운(水雲)이다. 경주 지방의 몰락한 양반으로 어려서부터 경전과 역사책을 두루 섭렵했다. 여러 산천을 거닐며 수양을 하던 도중 1859년 경주 용담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창시했다. 이때 동학은 서학인 천주교에 대항한다는 뜻이었으나, 동학 속에는 유교 · 불교 · 민간 신앙은 물론 천주교적 요소(평등사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전으로 《용담유사》와 《동경대전》을 편찬하고 평등사상인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 사상과 현세구복(살아서 복을 구함) 등의 교리를 세워 포교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고통 받던 농민층에게 큰 환영을 받아 1863년경에는 신도가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정부는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최제우를 혹세무민(세상을 속여 백성을 괴롭힘)의 죄를 지었다며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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