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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인물퀴즈

[006]철학사상가 인물 퀴즈 모음 #02 (난이도 있는 인문학 인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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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1. 이 인물은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그는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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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노자

 

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에서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하던 수장실사(守藏室史)를 하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둔할 것을 결심해 서방(西方)으로 떠나는 도중에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하는데, 도가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철학자

2. 이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다. 그 학원은 '○○○○○ 학원'이라 불렸다. 쾌락은 유일 최고의 선이며 인간 생활의 목적이나 그 쾌락이란 이른바 '방탕자의 쾌락'이 아니라 차라리 고통과 혼란으로부터의 소극적인 해방, 말하자면 '번뇌가 없는 평정(平靜, ataraxia)'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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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에피쿠로스(Epikouros)

사모스섬[島] 출생.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다. 그 학원은 '에피쿠로스 학원'이라 불렀고, 부녀자와 노예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는 기부금을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함께 우정에 넘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문란하지 않은 생활(아타락시아) 실현에 노력하였다.

'에피쿠로스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론(原子論)에 의하면 참된 실재(實在)는 원자(아토마)와 공허(케논)의 두 개뿐으로서, 원자는 불괴(不壞)의 궁극적 실체이고 공허는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이다. 원자는 부정(不定)한 방향으로 방황운동을 하는데, 이것에 의해 원자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서 이 세계가 생성(生成)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인간이나 신(神)들이나 모두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식(認識)이란 감각적 지각에 지나지 않고 물체가 방사(放射)하는 원자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의해 성립한다.

이 자연학에 의하여 그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공포를 인류로부터 제거하려 하였다.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散逸)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자기)도 소멸한다. 신들도 인간과 동질의 존재이며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금전욕·음욕(淫慾)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공공생활의 잡답(雜踏)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우애(友愛)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이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자연에 대하여》 등 300여 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산일되고 단편만이 전한다.


#철학자

3.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를 하느님(하나님)의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자체가 ○○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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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예수(Jesus Christ)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 탄생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제16장 15~17절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는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철학자

4. 이 인물은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의 저자이다.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렸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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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미셸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Montaigne城:현재의 생 미세르 드 몽테뉴 마을) 출생.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 Les Essais》의 저자이다. 대대로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에이퀨을 성으로 삼았다가 증조부 라몽 에이퀨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男爵領)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系)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1565년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15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을 1569년에 간행하였다. 1571년 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신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577년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년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권)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해 신장결석(腎臟結石) 치료를 겸하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 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여행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된 것을 알고 1581년 말 귀국하였다.

1583년 보르도 시장에 재선되었으나 종교적 내란과 페스트의 유행 등 많은 난국을 맞았다. 1586년에 몽테뉴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다시 제3권의 수필을 새로 집필하여 1588년 파리에서 《수상록》(3권)을 출판하였다. 그가 ‘결연(結緣)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구르네와 알게 된 것도 이 해이다. 만년에는 앙리 4세로부터 궁정 출사(出仕)를 간청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상록》 가필(加筆)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처음에 금욕적(禁慾的)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티우스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에도 공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르네는 그가 마지막 손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수상록》의 신판을 펴냈다. 그는 이 《수상록》(3권)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B.파스칼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점에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철학자

5. 이 인물은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이다. 인간의 정신능력 구분에 따라서 학문을 역사 ·시학 ·철학으로 구분했다. 다시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최대의 관심과 공헌은 자연철학 분야에 있었고 과학방법론 ·귀납법 등의 논리 제창에 있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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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영국의 철학자, 르네상스기의 대표적 인물. 정치가로서도 잠시 활동했다. 그의 철학은 영국의 본원적 축적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는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그것은 경험론에 의한 유물론적 견해와 귀납법과 경험적 과학을 새롭게 주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학문의 목적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데 있기 때문에 사물의 진정한 원인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스콜라 철학과 같이 도그마에 빠져 사변 속에 개념을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며, 또 임의의 경험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경험주의도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과학에 도움이 되는 실험에 기반한 귀납법을 명확히 해야 하며, 동시에 종래의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 이돌라설(說)을 말했다. 그가 근대 철학의 선두에 선 철학자로서 평가되는 것은 유물론의 전통을 부활시켜, 고대 그리스의 유물론을 높게 평가하고 관념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자연의 유물론적 개념을 발견, 물질이 여러 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고 그 결합의 다양함에서 자연의 다양성이 생기며, 또 물질은 운동을 그 본질로 한다고 봄과 동시에 운동을 단순히 기계적인 것으로 한정하지 않은 점 등에 있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도 시대적 제약에 의한 과거의 신학적 잔재가 섞여 있어, 그 점에서 그의 유물론이 정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사회관을 『신(新)아틀란티스』(nova Atlantis, 1627)에서 유토피아적으로 그려냈는데, 과학과 기술에 바탕을 둔 풍요로운 사회를 전개하면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철학자

6. 이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이다.  그는 종교 전쟁 뒤의 혼란을 목격하고, 모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확한 윤리를 만들기 위해, 이상적인 국가는 괴물처럼 무서워야 한다고 주장한 《리바이어던》을 집필한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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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영국의 철학자, 정치학자. 영국 유물론의 창시자인 베이컨의 유물론 철학을 계승, 체계화시켰다. 체계화의 과정에서 그는 수학적 요소를 중시, 자연 현상을 역학적, 양적 형식으로 파악함으로써 운동을 공간에 있어서의 역학적인 위치 변화로밖에 보지 못하였다. 결국 그의 이론은 베이컨이 물질에서 인지한 다양한 운동 형태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었고, “감성이 그 화려함을 잃은”, “인간 혐오”의 유물론으로 되었다(마르크스).

정치론에서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하여 이 무질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국가가 계약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국가 계약설을 폈다. 이 계약은 1회에 한한 것으로 취소할 수 없다고 하여 절대주의적 군주제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의 역점을 국가 권력의 절대성에 두어, 이것은 17세기 영국 혁명을 이룩한 여러 계급의 이해에 합치할 만한 것으로 되었다.


#철학자

7.  이 인물은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대상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철학자였다. 그는 모든 인간은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이끌어냈다.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을 중시함으로써 근대 서양 사상사의 흐름을 바꿨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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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르네 데카르트

 

1596년 프랑스 투랜의 라에에서 귀족 집안의 자제로 출생했다. 모친이 출산 후 14개월만에 사망하자 외조모에게서 양육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하여 주로 집안에서 지냈는데, 그 시간 동안 명상한 것이 훗날의 사상에 영감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1606년 라 플레쉬 콜레즈에 입학하여 인문학 교육을 받았고, 푸아티에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 불만을 품고 방랑하였으며, 1618년에는 네덜란드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1619년에는 첫 작품으로 <음악 개론>을 집필했고, 이후 학문에 뜻을 두고 파리와 네덜란드를 오가며 학문에 매진했다. 파리에서는 광학을 연구하여 빛의 굴절을 발견하였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자연과학 이론을 포괄적으로 서술한 <우주론>을 출판하였다.


#철학자

8. 이 인물은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이며,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도덕정치인 왕도(王道)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제후에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은거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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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맹자 [Mencius, 孟子] 

 

기원전 372년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쩌우청시[鄒城市]에 있었던 추현(鄒縣)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맹가(孟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맹자가 태어난 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존립했던 추(鄒)라는 작은 소국(小國)이었다. 추나라는 이후 노(魯)나라에 합병되었는 설도 있고 초(楚)나라에 합병되었다는 설 두가지가 존재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맹자의 어린시절과 성장기에 관해서는 신빙성있는 자료가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맹자가 학문을 익힌 것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후대 문하생에게서 유가사상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시(詩)와 서(書)에 능했다고 전한다. 맹자의 어머니 장(仉)씨는 현모(賢母)로 알려져 있으며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맹자가 살았던 시기는 7개의 제후국이 패권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전국시대였다. 전국시대는 합종(合從)과 연횡(連衡)으로 대표되는 외교적 책략으로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려는 인재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제후는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 패도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맹자도 전국시대에는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객으로 돌아다니며 제후들을 만났다. 당시 제후가 찾은 이상적인 인물은 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정책이나 뛰어난 외교적 책모(策謀)를 갖춘 인물이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전국시대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맹자》에는 맹자의 주유천하 한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53세에 위(魏)나라 양혜왕(梁惠王)을 만나 문답을 통해 자신의 왕도정치 소신을 펼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양혜왕이 죽고 아들 양양왕의 군주로써 인물됨이 부족하자 위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갔으며 제선왕(齊宣王)을 만나 인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인지 살피는 장면이 묘사된다. 맹자는 결국 왕도정치라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낙향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생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 것은 없다.

맹자의 사상을 담고있는《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후세의 제자들이 모아 만든 편찬물이며, 내용은 맹자의 사상 뿐만아니라 당시 제후와 재상을 만나 문답을 나눈 맹자의 행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한때 《맹자》는 주목받지 못하는 서(書)였고 금서(禁書)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유가의 명문으로 여겨지며 조선시대 사유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충만한 인간상을 주창하였는데 이는 서두르거나 조급하지 말고 일상적으로 인간 내면에 의(義)를 배양하고 기르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本性)은 본디 선(善)한 것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사람은 본디 4가지의 본성적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가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두번째가 자신의 옳지 못한 행실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한 행실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세번째가 겸손하여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네번째가 잘잘못을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이 4가지의 마음가짐이 사단(四端)이며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이고,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이며,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이며,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단을 가지고 있으며 신체의 두팔과 다리와 같기 때문에 사단을 실천하지 못함은 자신의 신체를 해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철학자

9. 이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이며, 철학 외에도 화학, 의학, 경제, 정치 등의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스콜라적이었으며 《인간오성론》,  《정부론》등의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정부론》에서 만약 통치자가 권력을 악용한다면 폭력으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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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존 로크 [John Locke]

 

1632년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의 링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지주이자 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자연과학·의학 등을 공부하였고, 한때 공사(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에 체류하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侍醫)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16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1690) 《제3서한》(1692) 《통치이론》(1690)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16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뒤 관직에도 있었으며,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아이작 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反)스콜라적이었으며,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조지 버클리와 데이비드 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內在的現象論)의 입장에서,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派)의 본유관념(本有觀念)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人智)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實體)'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基體)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色)·향(香)·음(音)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延長)·운동·고체성(固體性)과 같이 물(物)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前者)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實體形相)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보편개념의 설명·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意味論)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가능성·종류 등을 논하였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直覺知)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知覺)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한 것 이외에 따로 정리된 윤리서(倫理書)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神)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啓示)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理性的論證)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蓋然的)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理神論)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법·정치 사상에서는 계약설을 취하지만, 홉스의 전제주의(專制主義)를 자연상태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입법권과 집행권의 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여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혁명이나 아메리카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구(西歐)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유럽 문명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원시적 사회를 비교하는 등 서구 중심주의로 치우친 면이 있다.

또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교육법을 통렬히 비판하여 그리스·라틴어 집중주의,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수학적 추리와 체육(體育), 덕육(德育), 지육(知育)을 강조하였으며,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여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주장하였다. 그는 신체의 건강을 위한 단련주의 교육을 중시하였고, 지식은 체육과 덕육을 높이기 위한 2차적 수단으로 보았다. 그밖의 저서로 《금리저하와 화폐가치와 화폐가치 앙등의 결과에 관한 고찰》(1691) 《교육론》(1693) 등이 있다.

 

#철학자

10. 이 인물은 네덜란드의 철학자이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모든 것이 신이다”라고 하는 범신론(汎神論)의 사상을 역설하면서도 유물론자 ·무신론자였다. 그의 신이란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신이 아니고, 신은 즉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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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스피노자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었으며, 유대식 이름은 바뤼흐 스피노자였으나 스핀토자는 라틴어 이름인 베네딕투스를 선호했다. 유대교의 학교에서 랍비에게 배우며 헤브라이어와 성경을 공부하였으나, 졸업한 후에는 유대교의 신앙과 교리에서 멀어져 서구적 인문주의를 수용했다. 르네상스와 데카르트 철학을 받아들여 유대인의 학문을 비판하다가 1656년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파문되었다. 파문 이후 방랑 생활 속에서도 연구를 지속하여 <신ㆍ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짤막한 논문>, <지성 개선론>, <데카르트 철학 원리> 등을 집필하였다.
1670년부터 헤이그에 정착하였다. 안경 렌즈를 연마하여 생활하였다. 73년 하이델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초빙하였으나, 사상의 자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신학정치론>에 이어 15년을 들인 대작 <에티카>를 집필하였으나 출판하지 못했으며, 1677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일원론적 일신론에 대립하여, 일원론적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그가 생각한 신은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니라 '신은 곧 자연이다'라는 말에서처럼 자연 속의 모든 것이었다. 한편 그는 코나투스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이성의 작용이 신과 관계를 형성하며 사물을 직관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추구하였다. 그의 명언으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가 유명하지만, 이 말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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