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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인물퀴즈

[004]인물 퀴즈 모음(난이도 있는 인문학 인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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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1. 이 인물은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다.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에 살았으며 20세 경에 종교생활을 시작해 30세 경에 아후라 마즈다신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이름을 딴 종교를 창시하였다고 한다.  자라투스트라의 영어명인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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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조로아스터(Zoroaster)

 

자라투스트라의 영어명이다. 그가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은 고전 작가도 인정하지만,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Avesta》의 <야스나> 46의 14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그의 친구이며 후원자인 비쉬타스바로 불리는 왕이 유력한 단서인데, 그 역시 페르시아왕조의 어느 왕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가 비교적 유력한 시기로 추정된다. 20세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세경에 아후라 마즈다신(神)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拜火敎]를 창시하였다고 한다.


#리더

2.  이 인물은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해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외교상으로는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했고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했다. 이 인물의 시대는 아테네의 최성기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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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페리클레스(Pericles)

 

아버지는 크산티포스, 어머니는 아가리스테(클레이스테네스의 질녀). 소피스트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대단히 웅변적이었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와 예술가인 소포클레스, 피디아스 등과의 교분이 두터웠다. 유소년기의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BC 472년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이 상연되었을 때, 그 비용을 부담하는 코레고스(합창대 봉사자)가 되었을 때이다.

최고의 명문 출신이었으나 키몬에 대항하기 위하여 귀족파가 아닌 민주파의 지도자가 되어 BC 462년 에피알테스와 함께 귀족세력의 거점인 아레오스파고스 회의의 권리를 박탈,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하였다. 이듬해 에피알테스가 정적에게 살해당하고, 키몬이 도편추방되자, 정계에서 그의 지도권은 확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제3신분에 있던 자들까지도 최고관인 아르콘에 취임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배심관 ·관리의 일급(日給), 연극관람수당을 비롯하여, 관리를 희망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하는 등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BC 454년 그의 제안으로 델로스동맹의 기금을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동맹의 여러 도시는 거의 모두 아테네의 속국(屬國)이 되었고, 아테네는 제국(帝國)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 BC 447년부터는 파르테논신전의 건조를 시작하였고, 아테네 시가의 미화(美化)에도 힘썼다. 외교상으로는 페르시아와 ‘카리아스의 화약(和約)’을 맺고, BC 446년 스파르타와 향후 30년간의 화약을 맺는 등,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BC 443년에는 정적인 투키디데스(역사가와는 다른 사람)도 추방, 그 후 죽을 때까지 매년(만년의 극히 단기간 제외) 스토라테고스(장군직)에 선출되어 ‘지상의 제우스’라 불리게 되어 이름은 민주정(民主政)이나 사실은 1인 지배라 할 만큼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구가하였으며, 또 이것은 아테네의 최성기이기도 하였다. BC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시작되자 굳게 농성(籠城)하는 한편, 해군으로 하여금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위협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그 무렵 그를 권력으로부터 추방하려는 음모가 있어, 아낙사고라스 ·피디아스 등 그의 측근들이 기소당하였으나 그를 실각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때를 같이하여 아테네에 유행한 질병에 걸려 병사하였다.


#철학자

3. 이 인물은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문답법을 통한 깨달음,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하였다. 말년에는 아테네의 정치문제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4대 성인 중에 한명인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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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소크라테스

 

아테네 출신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다. 우주 원리에 관심을 가졌던 그리스 철학의 초점을 사람에게로 돌려 인간을 철학의 주제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소중히 여기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스스로 새로운 지혜를 낳을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지혜를 쌓도록 도울 수는 있다고 하여 자신의 활동을 산파에 비유하였다.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주고받는 토론을 즐겼으며, 문답 형식의 이런 대화법을 산파술이라고 한다. 그의 독창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 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신을 모독했다는 죄명을 받고 사형을 당했지만, 그의 철학 사상은 사후에도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다양한 학파를 이루며 서양 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혁신가

4. 이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수학자이다. 지구의 일주운동(日周運動)을 제창하였으며, 최초로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기하학적 저술인 논문 <태양과 달의 크기와 거리에 관하여>에서 3각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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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BC 281∼BC 280년에 하지(夏至)의 관측을 하였고,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일주운동(日周運動)을 한다고 제창하였다. 또한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한 최초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지동설은 그 뒤 히파르코스 등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그는 항성의 겉보기의 부동성과 태양을 도는 지구의 회전궤도를 조정하기 위하여, 항성구(恒星球)는 지구의 궤도를 포함한 천구에 비하여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고 가정하였다. 즉 그가 생각한 우주는, 그 이전의 사람들이 생각한 우주보다 훨씬 컸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논문 <태양과 달의="null" 크기와="null" 거리에="null" 관하여="null">는 본질적으로 기하학적 저술이지만, 이 속에서 3각법을 사용하고 몇 가지 가설을 마련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① 지구로부터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로부터 달까지의 거리의 18배나 되고, 20배보다는 짧다.

② 태양의 지름과 달의 지름의 비는 위와 같은 비율이다.

③ 태양의 지름과 지구의 지름의 비는 19:3 보다는 크지만, 43:6 보다는 작다.

이들 결과는 틀린 것이었지만, 그 방법은 옳았다. 시각(視覺) ·빛 ·빛깔에 관하여도 저술하고, 개량 해시계도 발명했는데, 이 해시계의 바늘은 오목(凹)면구의 중앙에 세워져, 태양의 방향과 높이는 반구면(半球面)에 표시된 눈금으로 읽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예술가

5. 이 인물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의 한 사람으로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니고 국가에 공헌하였다. 123편의 작품을 씀으로써 비극 경연대회에18회나 우승하였고 대표작은 《아이아스》, 《안티고네》 등이 있다. 상연 형식도 연구하였으며, 합창단과 배우의 수를 늘려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비극적 긴박감을 높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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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소포클레스(Sophocles)

 

아테네 교외의 콜로노스 출생. 아버지가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으므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아름다운 용모와 재능을 타고났고, 집안이 기사(騎士)신분에 속하였으므로 작가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명예로운 일생을 보냈다. 음악을 란푸로스에게, 비극을 아이스킬로스에게서 각각 사사하였다. BC 480년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축제 때는 하프를 연주하면서 무용단을 선도하였다고 한다.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녔으며, BC 443∼BC 442년 델로스 동맹 재무장관에 임명되어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10인의 지휘관직에 선출되었다. 또한 BC 413∼BC 411년의 아테네 내정의 동요기에는 국가의 최고위원 10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국가에 공헌하였다. 신앙심도 두터워 아스클레오피스의 신전을 자기 저택 내에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BC 468년, 28세 때 비극 경연대회에 응모하여 스승인 아이스킬로스를 꺾고 첫 우승한 이후로, 123편의 작품을 씀으로써 18회(일설에는 24회)나 우승하였다. 자기 후배인 에우리피데스가 사망하였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는 배우와 합창대의 관(冠)을 벗게 하고 자기 자신도 상복으로 갈아입어,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외국의 초청도 거절하고 평생을 아테네에 살았는데, 이러한 애국심과 진지한 인품은 온 시민의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비극 작법은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는 아이스킬로스풍의 장중 화려한 작풍이고, 중기는 엄밀한 기교주의이며, 후기는 원숙기로서 등장 인물의 성격과 일치하는 문체로 씌어 있다. 현존하는 7편을 연대 순으로 보면 《아이아스 Aias》 《안티고네 Antigone》 《오이디푸스왕 Oidipous Tyrannos》 《엘렉트라 Elektrai》 《트라키스의 여인 Trāchiniai》 《필로크테테스 Philoktetes》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 Oidipous epi Kolōnōi》인데,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는 원숙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아이아스》와 《안티고네》만은 중기의 특징을 남기고 있다.

이 밖에 사티로스극(劇) 《추적자》 외에 많은 단편이 남아 있다. 한편 배경화를 고안하기도 하고 소도구를 채용하는 등 상연 형식도 연구하였으며, 합창단을 종전의 12명에서 15명으로 늘리고, 또 배우도 종전의 2명에서 3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 3명의 배우의 대화를 통하여 각자의 성격을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그들의 성격이 서로 충돌하고, 보복하고, 파멸로 치닫는 과정을 복선(伏線)을 교묘하게 배치해 가면서 비극적인 긴박감으로 끌어올려 기막히게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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