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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1. 이 인물은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자(재위 BC 559∼BC 529)이다.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에크바타나를 수도로 하였으며 박트리아·칼데아 등을 함락시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를 지배하에 두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키루스 2세 (Cyrus II)
캄비세스 1세의 아들로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 대왕이라고도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키루스의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게스(Astyges)의 딸 만다네인데, 아스티게스의 꿈에 딸이 오줌을 누는데 황금 강물로 변해 왕국을 홍수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아스티게스가 사제들에게 꿈의 해몽을 묻자 손자들이 왕국의 통치를 위협할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스티게스는 만다네를 변방의 작은 왕국이었던 얀산의 왕에게 시집을 보내버렸다. 만다네와 얀센의 왕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키루스이며, 아스티게스는 키루스를 죽이려고 했으나 목동과 함께 달아나 실패하였다.
마침내 BC 559년 키루스는 안샨왕이 되었으며,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로 수도를 옮겼다. BC 546년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켰고 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다시 또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고,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 538년 나보니도스를 무찔러 칼데아(신 바빌로니아)를 멸하였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철학자
2. 이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스토아파의 시조이다. 그의 철학은 절욕(節慾)과 견인(堅忍)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자연과 일치된 삶’이 그 목표였다. 또한 그의 철학은 윤리학이 중심이며, 인생의 목표인 행복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이성 즉 로고스를 따르는 일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제논(ho Kypros Zénón)
키프로스섬 키티온 출생. 페니키아인(人)의 혈통으로 추정된다. 30세경에 아테네로 가서, 각 학파의 여러 스승에게 배운 뒤에, 독자적인 학파를 열어 아고라(agora:집회장, 중앙 광장)에 있는 이른바 ‘채색 주랑(彩色柱廊)’이라고 불리는 공회당(公會堂)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주랑을 스토아라 하므로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의 철학은 절욕(節慾)과 견인(堅忍)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며, 다른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빼앗기지 않는 행복을 얻는 힘을 부여하는 철학이었다. ‘자연과 일치된 삶’이 그 목표였다. 전통적인 여러 철학의 학설을 종합하여 풀이하였기 때문에 절충(折衷)의 흠은 있지만, 그 설의 근본에는 동방(東方)의 요소가 있다고 믿었으며, 이 독자성 때문에 순수한 그리스인 이외의 제자들을 많이 모아, 새로운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의 철학은 윤리학이 중심이며, 인생의 목표인 행복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神)의 이성(理性) 즉 로고스를 따르는 일이었고, 이로써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수사학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썼으나, 현재는 인용(引用)에 의해 그 단편이 알려질 뿐이다.
#혁신가
3. 이 인물은 그리스의 의학자. '의사의 아버지'. 인체의 생리나 병리를 체액론에 근거하여 사고했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는 설을 치료 원칙의 기초로 삼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년 에게해 남동쪽 코스섬에(Kos Island)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전해지는 성직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klēpios)를 섬기는 제사장이자 의사로 역할하였다. 히포크라테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의학의 실제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배웠다. 당시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와서 기도와 제사를 올리면 자신의 병이 치료된다고 믿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성장하면서 주변 국가인 소아시아·그리스·이집트를 여행하며 의술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았고 견문을 넓혔다. 그가 고향인 코스섬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맡았던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제사상을 맡지 않고 의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학 책을 저술하여 발표하였다. 또 제2·3의 여행을 계획하고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관찰력을 길렀으며, 합리적인 사고력을 깊게 하였다. 그의 학설을 모은 《히포크라테스 전집 Corpus hippocraticum》은 히포크라테스의 언설(言說)만을 편집한 것이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몇대에 걸쳐 의학도들에 의해 내용이 곁들여 졌다. 그에게는 테살루스(Thessalus)와 드라코(Draco)라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모두 의사가 되었다.
그는 임상(臨床)에서 관찰을 자세히 하고, 병이 났을 때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 즉 증세, 그중에서도 발열(發熱)을 반응현상(反應現象)이라 생각하여 그것은 병이 치유로 향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병적 상태에서 회복해가는 것을 ‘피지스(physis)’라고 불렀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라고 하는 설을 세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 피지스를 돕거나 또는 적어도 이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치료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증후학(症候學)·예후학(豫後學)에 대한 연구도 깊었던 그가 특히 빈사환자(瀕死患者)의 얼굴표정에 대하여 한 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의사의 윤리에 대하여도 중요한 설을 말하였고, ‘의학의 아버지’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라리사(Larissa)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며, 사망 당시 나이는 약 85~90세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체의 생리나 병리(病理)에 관한 그의 사고방식은 체액론(體液論)에 근거한 것으로, 인체는 불·물·공기·흙이라는 4원소로 되어 있고, 인간의 생활은 그에 상응하는 혈액·점액·황담즙(黃膽汁)·흑담즙(黑膽汁)의 네 가지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네 가지 액(液)의 조화(調和)가 보전되어 있을 때를 그는 ‘에우크라지에(eukrasie)’라고 불렀고, 반대로 그 조화가 깨졌을 경우를 ‘디스크라지에(dyskrasie)’라 하여, 이때에 병이 생긴다고 하였다.
#악당
4. 이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대 비극시인으로 모두 90여 편의 비극을 썼으며 온 그리스에 명성을 떨쳤다. 현재는 《오레스테이아》, 《페르시아인》 등 7개의 비극이 남아있으며 작품을 통해서 인간과 신의 정의가 일치한다는 것을 노래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에우포리온의 아들. 아티카의 데메테르 여신을 받드는 비교(秘敎)의 중심지 에레우시스 출생. 집안은 옛 신관직(神官職)을 맡아보는 귀족의 가문이었다. 젊어서 극작에 투신하였으나, BC 48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빛을 보았다. 이때 조국은 페르시아와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었다. 이 시인도 스스로 마라톤 평야와 살라미스 싸움에 참가하였는데 그의 형제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연극의 성공은 늦었으나, 그 뒤 30년 간에 13회의 성공을 거두어 그의 명성은 온 그리스 천지에 떨쳤다. BC 476년에는 시칠리아의 참주(僭主) 히에론(Hieron)의 초대를 받고 그곳에 머물다가, BC 458년 희곡 《오레스테이아 Oresteia》 상연 후 시칠리아를 다시 방문, 2년 뒤 이 섬의 젤라에서 죽었다. 그는 모두 90여 편의 비극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많은 제목과 부분적인 것 이외에는 7개의 비극밖에 없다. 가장 오래된 것은 BC 472년의 페르시아의 패배를 주제로 한 《페르시아인 Persian》이다.
영웅전설로 유명한 에디프스의 두 아들의 싸움을 다룬 《테베 공격의 7장군 Hepta epi Thēbās》(BC 467)은 그뒤에도 오랫동안 그리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극이었다. 상연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이 두 작품 이후의 것이라 여겨지는 《구원을 바라는 여자들 Hiketides》 《포박된 프로메테우스 Promētheus Desmōtēs》(BC 460)에서, 전자는 신혼 첫날밤에 신랑인 사촌 오빠들을 죽인 이집트왕 다나오스의 딸들 이야기이고, 후자는 인류를 위하여 제우스신에게 반항한 거인신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마지막 최대의 걸작 《오레스테이아》는 〈아가멤논〉 〈코에포로이〉 〈에우메니데스〉로 이루어진 완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3부작으로, 오레스테스의 어머니에 대한 살해 전설을 새로운 폴리스(도시국가)적 정의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그의 극은 견실한 구성보다는 분위기를 중시하고, 장대한 합창단의 노래로 전체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는 신들의 최후의 정의를 믿고, 인간의 정의가 언젠가는 신의 정의와 일치한다는 것을 항상 문제로 삼아, 이것을 비극에서 노래하였다.
#개혁가
5. 이 인물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다. 공화정 말기 내란 때 카이사르에게 대항했으나 사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왕이 되고자 하는 카이사르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를 암살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군과 싸우다 패해 자살했다.
정답 : 마르쿠스 브루투스 (Marcus Junius Brutus)
BC 83년 호민관(護民官)인 부친 M.U.브루투스가 죽은 후 소(小)카토의 지도를 받으며 원로원파(元老院派)에 속하여 BC 58∼BC 56년에 카토와 함께 키프로스에서 활약하였다. BC 53년에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프르케루의 부관(副官)이 되어 킬리키아로 갔다. 공화정 말기의 내란 때는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하여 G.J.카이사르에게 대항하였으나, 팔사로스의 회전(會戰) 후 카이사르는 그를 사면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간을 높이 평가하여 BC 46년 갈리아 키사르피나의 총독(總督), BC 44년에는 플라에토르(法務官)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지난 날 로마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창건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자손이라고 자처한 그는 왕이 되고자 하는 카이사르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해 3월 15일 동지 카시우스 등과 함께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 때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여! 너마저?”라고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형세는 그가 로마에 머무를 형편이 못되어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갔다. 마케도니아 총독 호르텐시우스의 지지를 얻어서 군대를 징모(徵募)하고, 원로원(元老院)에 의해 발칸반도에서의 군대명령권을 부여받았다. 이윽고 동방 제주(諸州)에서의 상급 명령권까지도 카시우스와 함께 받았으나, BC 42년 안토니우스 및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필리피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자살하였다.
그의 도덕적인 근엄성과 자주적인 태도는 그 시대의 사람에게 감화를 주었으나, 행동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구적인 편이었다. 변론가(辯論家)로서도 명성이 높았고 정치적·철학적인 작품의 저자로도 유명하였지만, 지금은 그와 키케로와의 사이에 오간 서한의 일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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