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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1. 이 인물은 유럽 문학 최고 최대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자이다. 두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로 그 후의 문학, 교육,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호메로스(Homeros)
유럽문학 최고 최대(最古最大)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자라고 전해진다. 그의 출생지나 활동에 대해서는 그 연대가 일치하지 않으나, 작품에 구사된 언어나 작품 중의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앞의 두 작품의 성립연대는 BC 800∼BC 750년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성장지로 추측되는 도시가 7군데나 되나 그 중 소아시아의 스미르나(현재 이즈미르)와 키오스섬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이 지방을 중심으로 서사시인으로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이오스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앞의 2대 서사시 외에 《호메로스 찬가》라는 일군(一群)의 찬가집(讚歌集)이나 익살스러운 풍자시 《마르기테스》와 《와서회전(蛙鼠會戰)》 등 몇 가지 서사시가 그의 작품이라고 하나 이것도 불명확하다. 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동일인의 작품이냐의 문제로 오래 전부터 논쟁이 많았다. 18세기 후반 F.A.월프가 《호메로스 서설(序說)》(1795)을 발표한 이래, 그의 존재 그 자체와 작품의 성립과정, 2대 서사시의 작자의 진부(眞否) 등 여러 가지 시비가 있었으나 어떻든 두 서사시는 한 작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일리아스》는 1만 5693행(行), 《오디세이아》는 1만 2110행의 장편 서사시이며, 각각 24권으로 되어 있다. 두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로, 그 후의 문학 ·교육 ·사고(思考)에 큰 영향을 끼쳤고, 로마제국과 그 후 서사시의 규범이 되었다.
#개혁가
2. 이 인물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이자 민족적 영웅이다. 호렙산에서 노예로 있던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협력자 아론과 함께 그들을 구출하였으며,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40여 년 간 광야를 유랑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모세 (Moses)
구약성서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집필하거나 혹은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律法)은 ‘모세의 율법’이라 일컬어진다.
최근의 고고학적·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입국, 이집트 탈출, 야훼 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이 역사적 사실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실재성이 매우 높아졌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모세라는 인물을 람세스 2세 시대인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자 민족 영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활동한 정확한 시기나 그와 관련된 일들을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집트로 들어간 히브리 민족은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는 등 파라오의 박해를 받았다. 이스라엘 레위족 집안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모두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을 피하여 나일강에 버려졌는데, 다행히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40세 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유목민 미디안족(族)의 사제(司祭)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아 게르솜과 엘리에젤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다.
80세가 되던 해 호렙 산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신 야훼의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협력자인 형 아론과 함께 파라오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 파라오는 야훼의 열 가지 재앙을 받은 후에야 히브리 민족을 내어주고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갔다. 이어 시나이산에서 야훼에게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개자가 되었다(출애 20:1∼17, 신명 5:6∼21, 출애 34:14∼33).
그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지만,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모세는 야훼의 명에 의하여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예리고 맞은 편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향년 120세에 죽었다(신명 33 ·34장).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선지자
3. 이 인물은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0대 왕(재위 BC 1379∼BC 1362).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세라고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 왕비는 네페르티티이다. 태양 상징 유일신 아톤을 신봉하였다. 종교개혁을 단행,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겼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아케나톤 (아크나톤(Akhnaton))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세라고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며 왕비는 네페르티티이다. 당시 이집트는 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펼쳤으며, 나일 계곡에는 많은 외국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왕은 모든 민족에게 공통의 세계종교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노모스[州]에도 속하지 않는, 태양을 상징으로 한 유일신(唯一神) 아톤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수도 테베는 주신(主神) 아몬의 사제(司祭)들이 권력과 막대한 부(富)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치세 6년째에 자신의 이름을 '아톤에게 이로운 자'라는 의미인 아크나톤으로 개명하고 테베를 버린 다음, 새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기고, 아케트 아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라 이름붙였다.
전국의 신전·기념비·무덤에서 아몬의 이름을 지웠다. 왕은 명상에 빠지고 아톤 찬가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왕의 이상은 이해받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몬 신앙은 부활하였으며, 수도는 다시 테베로 옮겨졌다. 그러나 자연과 진실을 중시하는 아톤의 가르침은 사실적이고 명쾌한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탄생시켰다.
#리더
4. 이 인물은 신(新)바빌로니아 제국 제2대의 왕(재위 BC 604~ BC 562)이다. 유대를 멸망시키고 그들을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느부갓네살 2세라고도 한다. 부왕(제국의 창건자) 나보폴라사르의 생전에 네코 2세가 거느린 이집트군을 카르케미시전투에서 격파하고(BC 605), 왕위계승 뒤에는 시리아 ·팔레스티나지방의 평정에 진력하였다. BC 597년 예루살렘을 공략하였으며, 이어 BC 587년에는 유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멸망시켜 그 곳의 수천 주민을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시켰다(바빌론의 유수). 이때가 BC 583년 이었으며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역사기록에 메달리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의 기록이 현재의 구약성서로 전하게 되었다. 또한 국내 각지의 신전을 부흥시키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력의 충실을 꾀하였다.
또 수도 바빌론을 정비하여 성벽을 쌓고 그 주위에 도랑을 파서 해자(垓字)를 만들었으며, 성문을 단단히 구축하였다.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만든 바빌론의 공중정원(空中庭園)과 마르두크 신전 등을 수복하였다. 따라서 함무라비의 황금시대에 대하여 이때를 바빌론의 부흥시대라고 말하는데, 고대 세계의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歷史)》 및 《다니엘》에 그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철학자
5. 이 인물은 기원전 6세기 말의 고대 그리스 사상가로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의 주요 철학자로 꼽힌다.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주장했으며 대립물의 충돌과 조화, 다원성과 통일성의 긴밀한 관계, 로고스(Logos)에 주목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헤라클레이토스 (Heraclitus of Ephesus)
기원전 540년경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 이오니아(Ionia) 지방에 세워진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에페소스(Ephesos, Ἔφεσος) 출신이다. 기원전 6세기 에페소스를 포함한 서부 연안 일대는 교역지로 명성이 높았다. 근동, 아프리카, 그리스 본토, 이탈리아 사이에서 생산된 다양한 물품과 사상들이 이 지역 십여 개의 도시들에 모였다가 서로 교환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고향인 에페소스는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 숭배가 특히 융성했던 곳으로 고대 그리스와 동방의 종교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시대적 배경은 훗날 그의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이 직접 써 아르테미스 신전에 바쳤다고 하는 《자연에 대하여(On Nature)》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삶이나 철학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 대부분은 후대의 것이거나 단편적이다. 남아있는 것들 중 가장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 사료는 3세기 전반에 활약한 그리스 사상가이자 전기(傳記)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의 저서 《고대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이다. 그러나 이 또한 헤라클레이토스 사망 수세기 이후에 진술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실과 허구의 정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헬레니즘 시대 위인전기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부 내용은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디오게네스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스의 저명한 귀족집안에서 브로손(Blosôn) 혹은 헤라콘(Herakôn,)의 아들로 태어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홀로 공부하고 스스로를 탐구해 철학적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of Colophon)의 제자였다는 설도 있으나 불분명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고독을 즐겼으며 선대 사상가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행동과 수수께끼 같은 심오한 말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로부터 ‘스코테이노스(Skoteinós, 어두운 사람)’라 불렸다. 한편 디오게네스의 진술에는 아테네의 그리스 철학자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가 헤라클레이토스가 동생에게 가문을 물려준 것을 들어 그를 매우 고매한 사람이라고 평가했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의 친구인 헤르모도로스(Hermodoros)가 국외로 추방되자 ‘가장 쓸모 있는 인물을 내쫓은 에페소스의 성년들은 모두 목을 매고 죽어버려야 한다. 미성년자들이 정치를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에페소스 시민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세상을 혐오하여 산속에서 풀이나 나뭇잎을 먹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온 몸이 부풀어 오르는 수종증(水腫症)에 걸려 도시로 돌아왔다. 그러나 홍수를 가뭄으로 바꿀 수 있냐는 질문에 의사들이 대답을 못하자 치료를 거부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쇠똥을 몸에 발라 햇볕에 말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치료법으로 체내의 수분을 증발시키려 했다. 이 방법으로 완치가 되었는지 여부는 문헌마다 의견이 다르며 60세에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사상과 의의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개념은 ‘대립물의 충돌과 조화’, ‘다원성과 통일성의 긴밀한 관계’, ‘로고스(Logos)’이다. 이 셋은 별도의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밀레토스학파(Milesian school)와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기원을 ‘불’로 생각했다. 이 근원적인 불은 절도 있게 타올랐다 꺼지는 것을 영원히 반복한다. 그리고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불꽃을 따라 일정한 주기로 대립하는 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지게 된다. 그는 이 과정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불은 변화하여 공기, 바람, 물, 흙, 영혼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오르막의 길에서는 불이 건조해져 흙이 물로 바뀌고, 증발로 인해 다시 공기나 다른 것들이 만들어진다. 바다의 증발은 순수하고 밝아 별이나 여름을 만드는 반면 땅의 증발은 습하고 탁한 어둠과 겨울을 생성한다. 한편 내리막의 길에서는 불이 짙어져 습한 물이 되고, 이것이 더욱 농축되어 흙으로 바뀐다. 즉 만물은 불로부터 만들어진 대립물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물은 생성과 소멸, 대립과 투쟁 안에서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불은 공기의 죽음으로 살고, 공기는 불의 죽음으로 산다. 물은 흙의 죽음으로 살고, 흙은 물의 죽음으로 산다.’,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건강을 달콤하게 만드는 것은 병이며 배부름을 달콤하게 만드는 것은 배고픔이다’이라는 말들로 표현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물질 이상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불은 근원적인 에너지이자 신적 요소와 인간의 영혼을 내포한다. 또한 불은 대립된 만물들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고 종국에는 다시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대 철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원성과 통일성의 긴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낮이자 밤이며, 겨울이자 여름이고, 전쟁과 평화이며, 포만감이자 배고픔이다.’, ‘결합시킬 대립물 없다면 통일도 없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동일하다.’, ‘선과 악은 하나다.’, ‘삶과 죽음, 깨어남과 잠듦, 젊음과 늙음은 같은 것이다.
로고스는 대립물의 충돌과 조화를 중시하고 다원성과 통일성이 궁극에는 하나임을 모색하려 한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핵심이다. 그가 했다고 전해지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태양은 날마다 새롭다’ 등의 격언들은 만물은 흘러가고 정지된 것은 없다는 그의 사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만물의 뒤에서 이들의 생성과 소멸을 이끄는 세계법칙(우주의 섭리), 즉 만물을 지배하는 세계이성 ‘로고스’에 주목했다. 그는 로고스의 영원한 섭리와 법칙에 따라 세상만물이 대립·투쟁·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근원에서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있어 모든 것은 정의롭고 올바르지만 인간은 어떤 것은 정의롭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근원법칙 로고스와 이를 기반으로 표출된 만물의 다양성을 정의한 말로 평가받고 있다.
우주론, 정치론, 신학론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작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후대 문헌들을 통해 전해진 그의 말과 사상은 고대와 중세, 근대는 물론 현재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는 만물이란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에 주목하고 때론 이를 반박했다. 중세 신학자들은 그의 로고스 사상을 기독교적 개념과 결합시켰다. 대립과 통일, 투쟁으로 인한 만물의 탄생 등은 헤겔, 니체, 다윈의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오늘날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난해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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