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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인물퀴즈

[005]철학사상가 인물 퀴즈 모음 #01 (난이도 있는 인문학 인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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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1. 이 인물은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이며, 7현인(七賢人)의 제1인자이며 밀레토스학파의 시조이다. 만물의 근원을 추구한 철학의 창시자이며 그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다. 물을 생명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으로 보았다. 변화하는 만물에 일관하는 본질적인 것을 문제삼은 데 그의 공적이 있는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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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탈레스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출생이다. 페니키아인의 혈통이며, 당초에는 상인으로 재산을 모아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BC 585년 5월 28일 일식(日蝕)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적 지식에 의했던 듯하다. 이집트의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기하학을 확립하였다. ‘원(圓)은 지름에 의해서 2등분된다’,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그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 등의 정리(定理)는 그가 발견한 것이다. 또, 닮은꼴을 이용하여 해안에서 해상에 있는 배[船]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고, 자석(磁石)이 금속을 끌어당기는 작용도 그의 발견으로 전한다.

또한 만물의 근원을 추구한 철학의 창시자이며 그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다(형이상학). 물은 생명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며, 또 물이 고체 ·액체 ·기체라는 3가지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에서 그렇게 추정한 듯하다(물활론). 변화하는 만물에 일관하는 본질적인 것을 문제로 한 점에 그의 불후의 공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대지(大地)는 둥근 편평상(扁平狀)이며 물 위에 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의 철학자라 불렸다.


#철학자

2. 이 인물은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이다. 이 사람은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으며, 수학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커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이 사람 이름을 붙인 정리법이 유명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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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피타고라스 

 

에게해(海)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므네사르코스(Mnesarchos)는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에게 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으며 아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어려서 부터 리라 연주와 그림, 운동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고 긴 여정의 장사길에 함께 데려가기도 하였다. 이후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던 탈레스(Thales)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간 수학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12년을 보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접한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섬에 학술 연구 단체이면서 수도원 성격을 띤 최초의 철학공동체를 결성하였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치며 육식을 금하는 채식주의를 따랐고 백색의 옷과 담요를 사용하였다. 그후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온화와 겸손, 과묵을 덕목으로 추구하였으며, 신들과 양친,친구,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信實)과 자제,복종을 설파하였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輪廻)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이론적 방면의 연구에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하였는데, 음악에서는 일현금(一絃琴)에 의하여 음정이 수비례(數比例)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하고 음악을 수학의 한 분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또는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예컨대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이고, 마찬가지로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또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 등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그의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오늘날의 그 정리의 증명법은 매우 다양하며 가장 대표적인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다).

그런데 이의 정리에서 의외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의 대각선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경우 대각선의 길이는, 한 변을 1이라 할 때 √2가 되어 약분이 불가능한 무리수가 된다. 이것은 자연수만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극히 난문제였기 때문에 수로부터 제외시켰던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과 같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플라톤의 다면체(多面體)'로 불리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의 작도를 필요로 하지만 한 선분을 중외비(中外比)로 끊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 작도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는 이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星形五角形)을 그의 교단의 휘장(徽章)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 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球形)임을 확신하고,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함을, 지구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생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가 생김을 이미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 밀려 1000여년 간 다른 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과학혁명의 최초에 피타고라스가 있었음이 인정되었다. 피타고라스에 의해 우주는 코스모스(Cosmos)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철학자 

1. 이 인물은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문답법을 통한 깨달음,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하였다. 말년에는 아테네의 정치문제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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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cus)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세노폰은 《회고록(Memorabilia)》에서 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과 아들을 타이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렸다. 당시 아테네에는 기존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로이 차용하고자 한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자 귀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으나 다시 세를 회복한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했다. 비록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들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귀족주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철학자

4. 이 명칭은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그리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철학사상가이자 교사들이다. 이 명칭은 그리스어서 유래되어 ‘지혜로운 자’ 혹은 ‘현명하고 신중한 자’를 뜻한다.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논변술을 강조하였으며, 진리와 정의를 상대적인 기준으로 바라본 이 교사들을 지칭하는 명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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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소피스트

 

소피스트(Sophist)는 ‘지혜로운 자’ 혹은 ‘현명하고 신중한 자’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본래는 현인이나 시인, 장인, 철학자들에게 존중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말이었으나 웅변술과 상대주의를 설파하는 교사의 강연이 인기를 누린 기원전 5세기 말부터는 교육자를 뜻하는 말로 고착화되었다. 그들은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지식과 재주를 가르치고 보수를 받았다.

대표적인 소피스트로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고르기아스(Gorgias), 프로디코스(Prodicos), 히피아스(Hippias),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등이 있다. 최초의 소피스트라 불리는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말로 진리의 주관성과 상대주의를 이야기했다. 고르기아스는 로고스로 칭한 언어의 힘을 강조하였다. 언어학자이자 인기교사였던 프로디코스는 보편성 부정에 대해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기원전 5세기 말 활동한 히피아스는 뛰어난 언변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다방면에 박식한 사람이었다. 수사학 교사 트라시마코스는 보편적 정의란 없으며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상가

5. 이 인물은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시조이다.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仁)에 대한 이 인물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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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공자

 

공자는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鄒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에서 BC 551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춘추 말기 사람으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인(仁)이며,‘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다)'를 그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인(仁)을 단지 도덕규범이 아닌 사회질서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 생각했다.  


 

 


#철학자

6. 이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30여 편에 달하는 대화록을 남겼는데 그 안에 담긴 이데아론(형이상학), 국가론 등은 고대 서양 철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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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플라톤

 

기원전 427년경 아테네의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대 사료들은 그의 아버지 아리스톤(Ariston)을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코드로스(Codros)의 자손으로, 어머니 페리크티오네(Perictione)를 그리스 7현인 가운데 하나인 솔론(Solon)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 어린 시절 유명 문학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레슬링 선수 아리스톤에게 몸을 단련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사상에 매료된 후 플라톤은 문학보다는 철학에 매진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은 당시 그리스 정치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아테네 내부에서는 민주주의 세력과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적인 시각은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극대화되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의 국가통치 이론을 내세웠으며 시민 가운데 통치자 계급을 따로 두어 정치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 처형으로 큰 상실감을 겪은 플라톤은 다른 제자들처럼 아테네를 떠났다. 그는 메가라(Megara),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종파를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사상을 접했다. 이 시기의 독특한 경험은 그의 사상과 저작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마흔 살이 지나 고향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Acadēmeia)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후 플라톤 아카데미라고 불린 이 학교는 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366년과 361년경 플라톤은 '이상국가'라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직접 실행하기 위해 시칠리아 시라쿠사로 갔으나,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Dionysios II)는 플라톤의 교육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오히려 폭군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보수 세력들의 반발로 시라쿠사의 그리스인을 통합하는 일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시칠리아의 반역자 혐의를 벗고 간신히 고국으로 돌아온 플라톤은 80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는데 보냈다.


# 철학자

7. 이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며 플라톤의 제자이다.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이 인물은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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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아리스토텔레스

 

BC 384년 스타게이로스에서 출생하였다.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 철학자

8.  이 인물은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다.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이 인물은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 교부철학과 신(新)플라톤학파의 철학을 종합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의에 이론적인 기초를 다졌다. 주요 저서로는 《고백록》이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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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아우구스티누스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 교부철학과 신(新)플라톤학파의 철학을 종합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의에 이론적인 기초를 다졌다. 중세의 기독교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가톨릭과 개신교에 현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누미테아 출신이다.

자서전인 『고백록』(Confessiones)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 사상을 편력한 후 386년에 가톨릭에 정착했다. 후에 히포의 사교(司敎)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회의론을 반박하였는데, 이 확실성은 후에 데카르트가 '나'의 확실성에서 자기 학설을 세웠던 발상과는 달리, 영원한 진리, 즉 이데아로서 영혼의 내면에 스며든 신의 빛(라틴어 illuminatio)에 의한 자기 존재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질 뿐이며,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고, 이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며(예정설)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 외에 구원은 없다'라는 그의 신앙과 사상을 역사철학의 형태로 전개한 것이 만년의 저작인 『신국론』(神國論, 413~426)인데, 그는 여기에서 인간의 존재를 지상적인 측면과 천상적인 측면 양쪽에서 파악하고, 역사를 인간에 대한 신의 구원 계획의 실현과정으로 보면서, 교회라는 보편적인 인간공동체의 확립을 통하여 영원한 기독교 공화국인 '신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실현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시대인 노예제의 붕괴와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몰락하고 있던 로마 제국에 있어 이교도가 횡행하는 황폐한 현실이 '땅의 나라'였던 것이다.


#철학자

9. 이 인물은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을 계승했으며, 기독교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학대전(神學大全)>,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등이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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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토마스 아퀴나스

 

1225년에 이탈리아에서 출생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중세 유럽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나폴리 대학교에서 논리학과 문법 같은 학문을 쌓았으며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반대하여 수도회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지만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아 수도사가 될 수 있었다. 1256년부터 파리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출강했으며 이때부터 수많은 저작물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지내던 중 1274년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을 계승했으며, 기독교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아퀴나스의 철학은 신을 중심으로 하지만 인간의 자율의지와 경험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인 근대 사상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험적 방법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교 철학과의 조화를 꾀하였으며, 독창적이면서도 짜임새 있는 자신의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스콜라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는 점에서 '스콜라 철학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며 그 공로로 1567년에 교회 박사로 뽑혔다.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학대전(神學大全)>,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등이 있다. <신학대전>은 아퀴나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신의 존재와 창조론, 죄 등 그리스도교의 주요 논란이 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반론을 질문 방식으로 담았다.


#철학자

10.이 인물은 리스의 키니코스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시노페의 ○○○○○라고도 한다.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생활을 실천하였다.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소원을 물으니,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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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디오게네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고도 한다.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고향인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에 와서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反)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몸소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自足) 생활을 실천하였다. 노미스마(nomisma:通貨)의 개주자(改鑄者)는 노미스마(관습)의 개혁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곁에 서서 소원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그곳을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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