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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1. 이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성직자이다. 17∼18세기 영국 고전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존재한다 함은 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라틴어 esse est percipi)라고 주장한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조지 버클리 [George Berkeley]
아일랜드 킬케니에서 태어났다. 17∼18세기 영국 고전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1704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1707년에 이 학교의 연구원이 되었으며, 《시각신설론(視覺新說論) 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1709)과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된 《인지원리론(人知原理論)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1710) 등을 저술하였다. 그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하여 버뮤다섬[島]에 이상적인 칼리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아메리카로 건너갔으나 그 계획은 실패했다. 귀국한 뒤 1733년에 아일랜드 클로인의 주교로 임명되어 지방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저술에도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옥스퍼드로 가서 지내다가 병사하였다.
버클리 철학의 근본명제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知覺)된다는 것(Esse est percipi)'으로 요약된다. 즉, 그는 능동적인 힘, 작용으로서의 정신실체 등과 그것에 지각되어 비로소 존재하는 '관념(idea)만을 인정하였다. 그는 또 지각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추상적 보편관념이란 같은 종류의 개개의 사물을 대표하는 기능을 부여한 개별관념이라고 역설하였다. 또, 색·향기 등 제2성질의 주관성에 대하여, 연장 ·운동 등 제1성질을 지각하지 않고도 실재한다고 생각한 J.로크의 입장을 부정하고, 나아가 물체적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한 D.흄에 앞서서 관념 사이의 인과율도 부정하였다.
버클리의 관념 및 정신실체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은 독아론(獨我論)과 내재적 현상론, 이 경향을 모두 수반하고는 있지만, 궁극에 가서는 '정신은 개아(個我)를 초월한 신(神)'이라고 생각하여, 말브랑슈(1638∼1715)에 가깝고 신(新)플라톤주의의 색채를 띤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으로 발전하였다. 이 경향은 그의 만년의 저작 《알시프런》(1732)과 《사이리스》(1744)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의 의도는 신흥 자연과학의 유물론과 동시대의 무신론·이신론(理神論)·자유사상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護敎論)에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철학자
2. 이 인물은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자연과학자 ·법학자 ·신학자 ·언어학자 ·역사가.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의 창시로,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무엇보다 그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도 합리적인 해석과 처방을 내리는, 합리주의의 절정에 있는 철학자라고 평가받는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
라이프치히 출생. 외교관 ·정치가 ·기사(技師) 등 실무가로서도 유능하였다. 라이프치히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장서 중 철학 ·고전을 탐독하고 논리학에 흥미를 가졌다. 12세 때 거의 독학으로 라틴어에 통달하였고 1661년 15세 때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수학, 이어 예나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쓴 논문 《개체의 원리 De Principio Individui》(1663) 《결합법론 De Arte Combinatoria》(1666)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 내용은 후일까지 그의 사상을 일관하였다. 1666년 라이프치히대학에 학위를 신청하였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667년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이 대학이 제공한 객원교수의 자리를 사퇴하고, 그 곳에서 연금술사들의 결사 로젠크로이체르에 들어가 비서가 되어 화학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마인츠후국(侯國)의 정치가인 J.C.보이네부르크 남작과 알게 되어 1670년 마인츠후국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정치생활에 들어가 마인츠후국의 외교사절로서 1672년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며, 루이 14세의 침략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형이상학을 연구하였다.
또 런던과 파리의 뛰어난 수학자 ·물리학자들과도 접촉하여 자연과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구체적 운동의 이론》 《추상적 운동의 이론》은 1670년경에 쓴 것으로, ‘불가분의 점(點)’의 가설에 서서, 운동을 물질의 본질인 것으로 보려는 형태를 취하였다. C.하위헌스, A.아르노, N.말브랑슈, R.보일 등과의 접촉에서는 당시의 최고 수준의 수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을 흡수하여 많은 논문을 쓰고, 영국 왕립학회회원이 되어, 그 후 우수한 계산기를 발명하였다(1674). 그러나 보이네부르크나 마인츠 선거후(選擧侯)가 잇달아 죽었으므로 그는 프랑스에 체류한 채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의 연금을 받으려는 공작도 실패하여, 1676년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후(侯) 프리드리히의 초청을 받아들여 하노버로 갔다. 그 도중 스피노자와 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버가(家)에서는 궁정고문이나 도서관리 등의 일을 맡아,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다면적인 활동을 하였다. 거기에는 공법학자 ·정치가로서의 활동, 독일 통일을 지향하는 신구 양 교회 및 신교 각파의 통일을 위한 노력, 《지구 선사(先史)》를 계기로 한 일반사의 연구, 언어 연구, 광산의 치수(治水)나 거기에 따른 풍차의 설계 ·건설, 백과전서의 계획, 아카데미 설립의 노력(170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됨) 등이 포함된다. 이 밖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수학 ·자연과학 ·철학상의 연구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말년은 불우하였으며, 실의 속에 70세의 생애를 하노버에서 마쳤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의 창시(1684∼1686)가 유명하다. 이것은 뉴턴과는 별개로 전개된 것이며,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R.데카르트를 비판하여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개념을 주어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향해 커다란 진전을 남겼으며(1686),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철학에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철학을 극복하고, 거기에 젊을 때부터의 ‘보편학’의 구상을 체계화한 《형이상학서설(形而上學敍說) Discours de Métaphysique》(1686)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하여 발전시킨 ‘표현’과 ‘표출’ ‘실체’ 개념의 결실인 유고(遺稿) 《단자론(單子論) Monadologia》(1720)이 유명하다.
실체개념을 논한 논문 중에는 ‘예정 조화(豫定調和)’의 개념을 도입(1696)하기도 하여 베일과의 논쟁을 초래하였다. J.로크의 비평으로서의 유고 《신인간오성론(新人間悟性論)》(1765)이나 《변신론(辯神論) Théodicée》(1710)도 유명하다. 그의 지우(知友)였던 프로이센 왕비 조피 샤를로테를 위해서 쓴 《변신론》은 예정 조화의 입장에서 철학과 종교의 융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었으나, 한편 신학적 ·형이상학적 요소(신과 예정 조화)를 지님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요소(개별과 보편, 유한과 무한의 연관, 실체의 자립 개념 등)를 갖추고, 신앙고백과 논리적 논증이 공존하여, 기계론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모순율을 기초로 하는, 말하자면 모순을 내포한 타협적인 것이었다. 그 배경을 당시 독일의 모순에 가득찬 사회적 생활에서 구하려는 견해도 있다.
#사상가
3. 이 인물 16세기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정치이론가. 대표작《군주론》에서 ○○○○○즘이란 용어가 생겼고, 근대 정치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군주의 자세를 논하는 형태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니콜로 마키아벨리
르네상스 말기 이탈리아의 사상가. 피렌체 공화정부의 서기관으로 재직 중, 외교ㆍ군사면에서 활약, 동시에 정치ㆍ군사ㆍ문학ㆍ역사 등 각 방면에 이르는 많은 저작을 펴냈다. 인간은 사회적ㆍ정치적 존재이며, 모든 정치는 힘의 관계(力關係)에서 비롯된다는 통찰과, 현재의 여러 조건 하에서 인간은 악(惡)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는 통찰이 그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당시 많은 소(小)국가로 난립해 있던 이탈리아의 발전을 위해서는 강대한 권력을 가진 군주에 의한 통일국가의 수립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는 도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정치의 기술적 합리성에 철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 후 일면적으로 과장되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이름 하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권모술수를 말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반드시 그의 본 뜻에 합치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사상가, 종교인
4. 이 인물은 610년 경 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박해를 피해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갔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한다. 메디나에서 신도들을 모아 630년 메카 함락에 성공한 그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를 세우고, 이를 확장했으며, 이후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전역에 퍼졌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무함마드 [Muhammad]
이슬람교의 시조. 아라비아의 상업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당시 메카를 지배하고 있던 쿠라이시 족의 하심가 태생이라고 전해지는데, 어려서 양친을 잃고 할아버지와 숙부 밑에서 성장했다. 25살에 15살 연상의 덕망높고 부유한 미망인인 카디자와 결혼, 15년 동안에 3남 4녀를 두고 상인으로서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40세 무렵(610) 메카 교외의 히라 언덕의 동굴에서 명상하던 중 하늘의 계시를 받아 알라를 유일신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
거래 관계로 여행한 시리아 지방 등에서 접촉한 유태교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재래의 씨족종교가 지니고 있던 우상숭배를 강하게 부정했고 피억압 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그 때문에 종교적, 정치적 지배자인 쿠라이시 족의 박해를 받아 622년에 메카에서 추방당해 야스리브(현재의 메디나)로 옮겨갔다(이것을 '헤지라'라고 함). 이 땅에서 교단을 조직했고 군대를 지휘하여 630년에 메카를 정복, 아랍 제 종족의 통일을 도모했다. 그 교의는 『꾸란(코란)』에 정립되어 있다.
#철학자
5. 이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이다. 그의 인식론(認識論)은, J.로크에서 비롯된 '내재적 인식비판'의 입장과 I.뉴턴 자연학의 실험·관찰의 방법을 응용했다. 인간본성 및 그 근본법칙과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학문의 근거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홉스의 계약설을 비판하고 공리주의를 지향한다. 그는 철학의 의미를 '일상을 반성케 하여 이따금 생활 태도를 교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데이비드 흄 [ David Hume ]
1711년 4월 26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출생하였다. 향사(鄕士)의 아들로 태어나 에든버러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한때 상사(商社)에 근무하였으나, 문학·철학을 지향하여 사직하고 1734∼1737년 프랑스에 체재하였다. 그곳에서 주저(主著) 《인성론(人性論) 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집필하여, 1739년에 제1권 〈오성편(悟性篇)〉과 제2권 〈감정편〉을, 1740년에 제3권 〈도덕편〉을 출간하였다. 이어 당시의 사회·정치·경제에 관한 토픽을 다룬 《도덕·정치철학 Essays Moral and Political》(1741∼1742)을 간행하여 호평을 받았다. 한편, 평판이 좋지 않던 《인성론》의 제1권 〈오성편〉을 개고(改稿)한 《인간 오성에 관한 철학논집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748)을 내놓았다. 그는 1744년 에든버러대학교, 1751년에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나, 모두 무신론자라 의심하여 거절당하였다. 1752년 에든버러 변호사회 도서관 사서(司書), 1763년 주(駐)프랑스 대사의 비서관, 1767∼1769년 국무차관을 역임한 후 은퇴하였다.
그의 인식론(認識論)의 의도는, J.로크에서 비롯된 내재적 인식비판(內在的認識批判)의 입장과 I.뉴턴 자연학의 실험·관찰의 방법을 응용해서, 인간의 본성 및 그 근본법칙과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학문의 근거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인간정신의 기본적 단위는 ‘인상’과 ‘관념’이며, 그 원천(源泉)으로서 감각과 반성(反省)이 이에 교차(交叉)한다. 원칙적으로 관념은 인상이 그 밑바탕이며 인상의 원인은 미지(未知)이다. 또한, 지식은 관념의 연합에 의해 성립한다. 따라서 이 연합의 3개의 관계(類似, 接近, 原因과 結果), 또는 7개의 철학적 관계(類似, 同一, 空間·時間關係, 量 또는 數, 性質의 程度, 反對, 原因과 結果)의 고찰이 중요하게 되는데, 특히 인과관계는 중요하다.
이 관계는 접근과 계기(繼起)의 관계에 더하여, ‘원인’에서 ‘결과’로의 ‘이행(移行)’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습관’에 의해 확립되며, ‘신념’에 뿌리박힌 것으로 객관적 필연성은 없다. 물체적 실체(物體的實體), 외계의 실재(實在)도 역시 마찬가지로 신념과 습관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G. 버클리가 인정한 정신실체(精神實體)도 ‘지각이 지나가는 무대’ ‘지각의 다발’로서가 아니면 부정(否定)된다. 따라서, 흄의 인식론은 표면상으로는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 결말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내재적 현상학의 한 귀결이며, I.칸트를 이성론(理性論)의 독단(獨斷)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철학은 《인성론》의 제2,3편이 ‘감정편’ ‘도덕편’인 것을 보아도 분명한 것처럼, 흄 철학의 목표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유명한 구절이 대표하듯이, 감정은 오성·지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그것이 인상·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만 인식론에 관계된다.
흄은 도덕의 밑바닥에 ‘공감(sympathy)’을 두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상호간에 주고받는 쾌락과 고통의 감정과, 상호간의 덕성(德性)을 판정하는 시인(是認) 및 비난의 감정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 주장은 특별한 도덕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자연주의적이고, 또한 사회적 성격을 보여 주는 점에서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이다. 종교도 역시 심리적·역사적 분석 수법에 의해 자연주의적으로 해명되며 이신론(理神論)의 입장이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하는 생활감정에 의해 재해석(再解釋)되고, 기초가 다시 다져진다. 정치 ·법사상에서는 T.홉스의 ‘자연상태’의 가정(假定)과 계약설을 비판하고, 만인에 공통된 ‘이익’의 감정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공리주의적 방향을 제시한다.
#철학자
6. 이 인물은 독일의 철학자리가.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저서에《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 등이 있다. 그는 과학의 세계를 회의론으로부터 구해낸, 엄격한 인과율이 지배하는 과학의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 법칙을 살려낸 철학자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임마누엘 칸트 [ Immanuel Kant ]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馬具)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邊境)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天界)의 일반자연사와 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力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星雲說)’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歸依)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神)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場)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要請)’이라는 형태로 신(神) ·영세(永世)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構想)은 그 후의 《종교론》(17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場)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美)와 유기체(有機體)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이상 3권의 비판서에 의하여 그 토대가 놓여진, 비판철학 사상과 밀접히 관련하여, 또는 그 위에 기초한 사고(思考)를 전개한 기타의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의 해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1783), 《실천이성비판》에 앞서 비판적 논리학의 기본구상을 기술한 《도덕형이상학원론(道德形而上學原論)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이것에 기초한 법철학 ·도덕철학의 구체적 체계를 전개한 《도덕형이상학 Metaphysik der Sitten》(1797), 그 자매편으로 자연철학의 체계를 전개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1786)가 있다. 또 오랜 기간의 강의를 정리하여 출판한 《인간학》(1798) 《자연지리학》(1802)은 칸트의 폭넓은 실제적 지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독일의 대학 ·논단을 석권하였고, J.G.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 ·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新)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철학자
7. 이 인물은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모든 사물의 전개(展開)를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辨證法)은 그의 논리학과 철학의 핵심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게오르크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생.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뒤빙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 J.C.F.휠데를린 및 F.W.셸링과 교우하였다. 졸업 후 7년간 베른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나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 Phänomenologie desGeistes》을 내놓아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 무렵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폐쇄되자 밤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주저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1812∼1816)을 저술하였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 그 동안 《엔치클로페디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17)를 발표하였으며, 1818년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곧 마지막 주저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1821)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1831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있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이상에 치중, 이 이상을 현실로 실현해야 하며 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그 이상이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알맞게 부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노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헤겔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 ·신(神)이 점차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理性)이고 그 본질(本質)은 자유(自由)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며, 단 한 사람 전제군주(專制君主)만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는 시대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현대는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3부로 되었으며,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展開)를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辨證法)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반면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外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논리학에서는 자연 및 정신에 대하여 고루 타당한 규정이 다루어졌다.
그의 철학은 그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후세에 다대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철학자
8. 이 인물은 독일의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은 Ⅰ.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피히테, F.W.J.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 근본적 사상이나 체계의 구성은 같은 ‘독일 관념론’에 속한다. 그는 《부록과 보유》라는 책으로 주목받았으며,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비판 정신을 가졌던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염세사상의 대표자로 불린다. 단치히 출생. 은행가와 여류작가인 부모 덕택에 평생 생활에 걱정 없이 지냈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자 자유도시 함부르크로 이사하였고, 1803년에는 유럽 주유의 대여행을 떠났다. 1805년 그를 상인으로 만들려던 아버지가 죽자, 고타의 고등학교를 거쳐 1809년부터는 괴팅겐대학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우고, G.E.슐체의 강의를 들었다.
이어 1811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J.G.피히테와 F.E.D.슐라이어마허를 청강하였으며,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Ü 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tazes vom Zureichenden Grunde》(1813)로 예나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때를 전후한 사교가인 모친 요한나와의 불화·대립은 유명한데, 이로 인해 햄릿과 같은 고뇌에 빠졌고, 그의 독특한 여성혐오, 여성멸시의 한 씨앗이 싹텄다. 바이마르에서 살면서 J.W.괴테와 친교를 맺었고, 그에게서 자극을 받아 색채론(色彩論)을 연구하여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 Ü ber das Sehen und Farben》(1816)를 저술하였다.
또한 동양학자 F.마이어와의 교우(交友)로 인도고전에도 눈을 뗬다. 드레스덴으로 옮겨 4년간의 노작인 저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를 발표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1820년에 베를린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G.W.F.헤겔의 압도적 명성에 밀려 이듬해 사직하고, 1822∼1823년의 이탈리아 여행 후 1831년에는 당시 유행한 콜레라를 피해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옮겨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철학은 Ⅰ.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피히테, F.W.J.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를 공격하였으나, 그 근본적 사상이나 체계의 구성은 같은 ‘독일 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론(論) 및 인도의 베다철학의 영향을 받아 염세관을 사상의 기조로 한다. 즉, 그는 칸트와 같이 인간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는 시간 ·공간 ·카테고리(category), 특히 인과율(因果律)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형식으로 구성된 표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 전체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세계의 존재는 주관에 의존한다. 세계의 내적 본질은 ‘의지’이며, 이것이 곧 물(物) 자체로서, 현상은 이 원적(原的) 의지가 시간 ·공간인 개체화(個體化)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에 의하여 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물 자체를 인식불가능으로 한 칸트와는 달리, 그는 표상으로서의 현상세계(現象世界) 배후에서 그것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 자체를 의지로써 단적으로 인식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세계의 원인인 이 의지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형이상학설을 배경으로 할 때, 인간생존의 문제는 이 의지에서 출발하여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는 무욕구의 상태, 즉 이 의지가 부정되고 형상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열반(涅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그는 이와 같이,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한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靜寂)의 획득을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서 제시하였고, 또한 그렇게 하여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 즉 동고(同苦:Mitleid)를 최고의 덕이자 윤리의 근본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염세관의 사조(思潮)에 영합하여 크게 보급되었다.
의지의 형이상학으로서는 F.W.니체의 권력의지에 근거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의 사상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밖에도 W.R.바그너의 음악, K.R.E.하르트만, P.도이센의 철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철학자
9. 이 인물은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대표적 계몽사상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고, 오늘날 《자디그》,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역사 작품이 높이 평가된다.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사상의 자유, 종교적 관용, 이성과 평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억압에 맞선 투사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볼테르 [Voltaire]
본명 François-Marie Arouet. 파리 출생.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예수회 학교 루이 르 그랑에서 공부하였다. 1717년에 오를레앙공(公)의 섭정(攝政)을 비방하는 시를 썼다 하여 투옥되었는데, 비극 《오이디푸스 d’Þdipe》를 옥중에서 완성하고, 1718년에 상연하여 성공을 거둔 다음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바꾸었다.
그후 한 귀족과의 싸움으로 재차 부당하게 투옥되었으며, 국외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제정치하의 불평등에 환멸을 느끼고 1726년에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면서 타고난 비판정신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종교전쟁을 끝나게 한 앙리 4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앙리아드 Henriade》(1728)를 출판한 후, 1729년에 귀국하였으며, 셰익스피어극의 영향을 받은 사상극 《자이르 Zaïre》(1732)를 발표하였다. 이어 《철학서간(영국서간) Lettres philosophiques ou Lettres sur les anglais》(1734)을 통하여 영국을 이상화하고 프랑스 사회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애인 뒤 샤틀레 후작부인의 영지(領地)에서 1734년부터 10년 간을 저술과 연구로 보냈다. 그동안 희곡 《마호메트 Mahomet》(1741) 《메로프 Mérope》(1743), 철학시 《인간론》(1738) 등을 발표하였다. 1744년에 친구의 외무장관 취임과 함께 프랑스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746년에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혀 역사 편찬관이 되었으나, 또다시 궁정의 반감을 사서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175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빙으로 베를린에 가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 Le Siècle de Louis XIV》(1751)를 완성하고 베를린을 떠났다. 그 후 수년 동안 제네바에 머물다가, 1761년에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페르네의 한촌(寒村)에 들어갔다.
1778년에는 자작(自作)인 《이렌 Irene》의 상연을 위해 파리에 갔다가 병사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페르네의 장로(長老)’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반봉건 ·반교회 운동의 지도자로서 수많은 공격적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종교적 편견에 의한 부정재판을 규탄한 칼라스 사건(1761) 등의 실천운동도 유명하다. 그 성과인 《관용론(寬容論) Traité sur la tolérance》(1763)과 세계문명사인 《풍속시론(風俗試論)》(1756), 철학소설 《캉디드 Candide》(1759) 《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f》(1764)이 만년의 대표작이다.
볼테르의 생전에는 많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간결한 문체의 《자디그 Zadig》(1747)나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그리고 문명사적 관점에 따른 역사 작품이 더 높이 평가된다. 한편, D.디드로, J.J.루소 등과 함께 백과전서(百科全書)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과전서파의 한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철학자
10. 이 인물은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그의 핵심 사상은 겸애(兼愛)이다. 겸애란 유가의 차별적 사랑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그 뜻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듯이 타인과 타인의 가족, 타인의 국가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또한, 유교의 허례허식을 비판하여 대립하였으며, 중앙집권적 국가를 지향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정답 : 묵자 [墨子]
이름은 적(翟).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한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漢書)》지(志)에는 71편으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은 한(漢)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묵자의 겸애설란 사람은 ‘자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尙同論)이 있으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天志論)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下]은 윗사람[上]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인일의(一人一義) 십인십의(十人十義)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尙同)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賢者)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天子)가 있다”는 것이다. 명귀론(明鬼論)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非命論)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命: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 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編)과 비공론(非攻論)에서 출발한 방어술(防禦術) ·축성술(築城術)에 관한 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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