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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인물퀴즈

[008]철학사상가 인물 퀴즈 모음 #04 (난이도 있는 인문학 인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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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가

1. 이 인물은 18세기 프랑스의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 엘로이즈》,《에밀》,《고백록》등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철학은 이성과 합리로 평가하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줬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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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장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루소를 낳고 얼마되지 않아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1750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과학과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1755), 《정치 경제론 De l’économie politique》(1755), 《언어기원론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re à d’Alembert》(17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新) 엘로이즈 Nouvelle Héloïse》(17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民約論) Du Contrat social》(17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 Émile》(17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 ·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 Les Confessions》을 집필하였다.


1768년에 1745년 이래로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유해를 팡테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철학자

2. 이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법학자이다. 인생의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실현에 있으며 쾌락을 조장하고 고통을 방지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입법의 기초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였다. 변호사를 하다가 나중에 민간연구자가 되었는데, 의회의 개혁과 같은 정치활동에도 관계한 바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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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제러미 벤담 [Jeremy Bentham]

 

1748년 2월 15일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변호사를 하다가 나중에 민간연구자가 되었다. 인생의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실현에 있으며 쾌락을 조장하고 고통을 방지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입법의 기초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쾌락의 계산법을 안출하였으며, 쾌락(플러스)과 고통(마이너스)을 강도·계속성·확실성·원근성(遠近性)·생산성·순수성·연장성(延長性)이라는 7개의 척도를 써서 수량적으로 산출하려고 하였다. 쾌락과 부(富)는 양(量)에 비례하지 않으며, 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행복은 부의 양이 늘수록 줄어든다고 보고 한계효용을 내세웠다.

행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유방임(自由放任)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한계효용이 점감(漸減)하는 이상, 부가 다른 조건상으로 동일하다면, 보다 평등하게 이를 분배하는 편이 전부효용(全部效用)을 증가시킨다 하여, 분배의 평등을 중시하였다. 공리주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의회의 개혁과 같은 정치활동에도 관계하였다. 주요저서는 《정부소론(政府小論)》(1776)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1789, 신판 1823) 등이다.


 

#철학자

3.  이 인물은 독일의 시인·철학자이다. 그는 아포리즘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가치들을 부수어 버린 철학자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의 책을 썼다. 그는 주어진 운명을 꿋꿋하게 개척해 나가라며, 생명과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생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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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프리드리히 니체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ä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ö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ö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ö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상가

4.  이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의 창시자이다. 히스테리 환자를 관찰하고 최면술을 행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꿈·착각·해학과 같은 정상 심리에도 연구를 확대하여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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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년 5월 6일 모라비아(현 체코) 지방 프라이베르크 마을에서 유대인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세번째 결혼한 아말리에(Amalie)와의 사이에서 지그문트를 낳았다. 그의 이복 형은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했다. 이복 형제들에 비해 어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고 김나지움 7학년 내내 최우수 학생으로 총명했다. 빈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에른스트 브뤼케 실험실에서 신경해부학(Neuroanatomy)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얼마 동안 뇌의 해부학적 구조를 연구하였고, 코카인의 마취작용을 연구하여 우울증 치료제로 시도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1885년 파리의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 정신병원에서 마르탱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 환자를 관찰하였고, 1889년 여름에는 낭시(프랑스)의 베르넴과 레보 밑에서 최면술을 보게 되어, 인간의 마음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J.브로이어는 히스테리 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 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그 치유의 방법을 연구하였고, 1893년 카타르시스(Katharsis:淨化)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치유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여 히스테리를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1896년 이 치료법에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후에 그가 수립한 심리학의 체계까지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900년 이후 그는 꿈·착각·말실수와 같은 정상 심리에도 연구를 확대하여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고, 또 1905년에는 유아성욕론(幼兒性慾論)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초기 그의 학설은 무시되었으나, 1902년경부터 점차 공명하는 사람들(슈테켈, 아들러, 융, 브로일러)이 나타났으며, 1908년에는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개최되어 잡지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연구연보》(1908∼1914), 《국제정신분석학잡지》 등이 간행되었다. 또 1909년 클라크대학 20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어 강연한 일은 정신분석을 미국에 보급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사변적 경향을 강화하여 이드(id)·자아·초자아(超自我)와 같은 생각과, 생의 본능 에로스·죽음의 본능 타나토스 등의 설을 내세웠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스에 쫓겨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이듬해 암으로 죽었다.

20세기의 사상가로 프로이트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다고 평가되며, 심리학 ·정신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사회심리학·문화인류학·교육학·범죄학·문예비평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저서에는 《히스테리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 《토템과 터부》(1913), 《정신분석 강의》(1917), 《쾌락 원칙을 넘어서》(1920), 《자아와 이드》(1923) 등이 있다.


#철학자

5.  이 인물은 미국의 철학자·논리학자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이다. 그에 의하면, 개념이란 그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실제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곧 프래그머티즘의 기본적 문제로서, W.제임스, J.듀이에게 계승되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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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찰스 퍼스 [Charles Sanders Peirce] 

 

매사추세츠주(州) 출생.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이다. 케임브리지 하버드대학교 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미국 연안측량부 기사로서 기술면에서 갖가지 공헌을 하는 한편, 철학 및 논리학에 대한 독창적인 논문을 차례로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너무나 선구적인 업적이었으므로, 일반에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 전 8권 전집(1958, 완결)이 출판된 후부터였다.

그에 의하면, 개념이란 그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실제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이 곧 프래그머티즘의 기본적 문제로서, W.제임스, J.듀이에게 계승되었다. 논리학에서는 '관계의 논리학' 영역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B.러셀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철학자

6. 이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주자의 사상을 깊게 연구하여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주리론(主理論) 전통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로 숭앙된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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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이황 [李滉]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초명(初名)은 서홍(瑞鴻)이다. 자(字)는 경호(景浩)이며, 호(號)는 퇴계(退溪)인데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에서 비롯되었다. ‘계(溪)’는 이황이 물러나 머물렀던 ‘토계(兎谿)’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해석된다. 청량산(淸凉山) 기슭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도옹(陶翁)·도수(陶叟)·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별호(別號)도 사용했다.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다.

1501년 11월 25일(음력) 예안(禮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진사 이식(李埴,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됨)의 7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이우(李堣)에게 학문을 배웠다. 1528년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34년 식년시(式年試)에서 문과(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외교 문서의 관리를 담당하던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교리(校理)·교감(校勘) 등을 역임했으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侍講院)의 문학(文學) 등의 직위에도 있었다. 1542년에는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고, 1543년에는 성균관의 교수직인 사성(司成)이 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으나, 곧바로 서용(敍用)되어 사복시(司僕寺) 정(正)·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547년에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 의빈부(儀賓府) 경력(經歷)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兎溪) 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48년에는 충청도 단양의 군수(郡守)가 되었는데,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의 군수로 옮겼다. 당시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병으로 물러났어도 왕을 가까이서 섬기던 이황에게 갑자기 외직(外職)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扁額)과 서적(書籍), 학전(學田) 등을 내려줄 것을 건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황의 건의를 받아들여 1550년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함께 면세와 면역의 특권도 부여하였는데, 이로써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1549년에는 병을 이유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토계 인근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1551년에는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황은 1550년 형인 이해가 참소(讒訴)를 당해 유배지로 가던 도중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관직에 올랐다가도 곧바로 사퇴하기를 되풀이하였다. 1552년에는 홍문관 교리(校理)로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시독관(侍讀官)으로 참여해 왕에게 불교를 멀리하고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刑曹)와 병조(兵曹) 참의(參議), 충무위(忠武衛) 상호군(上護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번번이 사양하고 물러났다. 명종(明宗)은 이황을 아껴 1555년에는 낙향해 있던 그에게 음식물 등을 전하며 되도록 빨리 돌아오라는 전교(傳敎)를 내리기도 하였고, 화공(畵工)을 보내 도산(陶山)의 풍경을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기도 했다. 1558년과 1559년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으나, 이황은 사직을 청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6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고, 명종은 이황에게 내의(內醫)를 보내 문병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황은 명종의 잇따른 부름을 사양하고 고향인 예안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1556년에 예안향약(禮安鄕約)을 만들었고, 1561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1567년 명종이 죽고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에는 명종의 행장(行狀)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황은 병을 이유로 곧바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선조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이황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특별히 교서(敎書)를 보내 다시 부르자 상경하여 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대학(大學)>과 <예기(禮記)> 등을 강론하였다. 1568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으로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며 사직을 청하였고,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계속해서 조정에 들어올 것을 청하자, 그 해 7월에 상경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그리고 실록청(實錄廳)의 도청당상(都廳堂上)을 겸임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때 선조에게 <무진봉사(戊辰封事)>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제출하였다. <무진봉사>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을 여섯 조항으로 정리하여 상소한 것으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라고도 불리며, 이이(李珥)의 <만언봉사(萬言封事)>와 더불어 조선 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잘 드러내는 저술로 꼽힌다. 1569년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이황은 1570년 12월 8일(음력)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1574년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도산서원이 세워져 그의 위패를 안치하였으며, 이듬해 선조는 도산서원에 한석봉(韓石峯)이 쓴 편액을 하사하였다. 1600년에 조목(趙穆) 등이 그의 글을 모아 51권 31책으로 구성된 문집을 편찬했으며, 1610년에는 공자(孔子)와 명유(名儒)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그는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비롯해 다수의 시를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조식(曺植)·기대승(奇大升) 등과 교류하며 나눈 편지 등도 전해진다. 그가 쓴 편지글은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로 따로 편찬되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자성록(自省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이학통록(理學通錄)>, <계몽전의(啓蒙傳疑)>,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 <경서석의(經書釋義)>, <심경후론(心經後論)> 등의 저술을 남겼다. 유묵(遺墨)으로 <퇴계필적(退溪筆迹)>과 <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遺帖)>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958년 대동문화연구원에 의해 <퇴계전서(退溪全書)>로 편찬되었다.


#철학자

7. 이 인물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비판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으며, 예(禮)를 강조하여 유학 사상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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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순자 [ Xunzi , 荀子 ]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이며 조(趙)나라 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은 기원전 약 298년으로 추정한다. 성은 순(荀)이고 이름[名]은 황(况)이다. 그리고 자(字)는 경(卿)이다. 순경(荀卿)이 아니라 손경(孫卿)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순(荀)과 손(孫)의 옛소리[古音]가 서로 통했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비판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으며, 예(禮)를 강조하는 유학 사상을 발달시켰다.

<사기(史記)>의 '순경열전(荀卿列傳)'에 따르면, 순자는 조(趙) 나라 출신으로 나이 50세 무렵에 제(齊) 나라에 유학(遊學)하여 최장로(最長老)의 학사(學士)로 세 차례나 제주(祭酒)를 지냈다고 기록한다. 후에 참소(讒訴)를 받아 제(齊)를 떠난 순자는 초(楚)의 재상(宰相)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 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난 순자는 난릉에 머물며 문인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순자는 스스로 공자를 추앙하는 유학자로 자처했고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전한(前漢) 말기에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정리되었고, 당(唐)의 양량(楊倞)은 여기에 주(註)를 붙이고 20권 32편으로 다시 정리했으며 명칭을 <손경자(孫卿子)>라 하였다. 오늘날 <손경신서(孫卿新書)>는 망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며, 양량(楊倞)의 주석본이 간략히 <순자(荀子)>라고 불리며 전해지고 있다. <순자> 32편은 '권학(勸學), 수신(修身), 불구(不苟), 영욕(榮辱), 비상(非相), 비십이자(非十二子), 중니(仲尼), 유효(儒效), 왕제(王制), 부국(富國), 왕패(王霸), 군도(君道), 신도(臣道), 치사(致士), 의병(議兵), 강국(彊國), 천론(天論), 정론(正論), 예론(禮論), 악론(樂論), 해폐(解蔽), 정명(正名), 성악(性惡), 군자(君子), 성상(成相), 부(賦), 대략(大略), 유좌(宥坐), 자도(子道), 법행(法行), 애공(哀公), 요문(堯問)'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자

8. 이 인물은 독일 19세기 말, 근본적인 문제였던 '빈부격차의 대립'을 해결하려고 했던 철학자다. 그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소비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목표로 사유 재산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본론≫을 썼다. 그는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한 철학자였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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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카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라인주(州) 트리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곤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철학자

9.  이 인물은 프랑스의 철학자.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를 지냈다. 그는 프랑스 유심론(唯心論)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C.R.다윈·H.스펜서 등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학설은 철학·문학·예술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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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년 10월 18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앙제와 파리의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00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유심론(唯心論)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C.R.다윈·H.스펜서 등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였는데, 이와 같은 그의 학설은 철학·문학·예술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생물의 진화는 동물과 식물의 2대 방향으로 진화되어 나아가는데 지성적 인간은 전자의 정점(頂點)에 서 있다. 이 진화는 기계론적(機械論的)도 아니고 목적론적(目的論的)도 아니다. 이 진화는 동적(動的)이며 예견(豫見) 불가능한 내적(內的) 충동력인 엘랑비탈, 즉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창조적 진화이다. 인간의 지성(知性)은, 정적(靜的)이며 고정화(固定化)된 것을 다루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동적인 흐름을 파악할 때는, 지성은 이를 정적 요소의 한 연속으로 환원시켜 버린다(지성의 ‘영화촬영적 방법’).

지성은, 예를 들면 시간을 표준단위에 의하여 측정할 수 있는, 평면상의 등질적(等質的) 직선과 같은 존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시간은 이질적(異質的)인 과정의 구체적이며 불가분(不可分)한 것의 연속이다. 또 지성은, 어떤 사물(事物)이 출현하면, 여러 기존요소를 재구성하여 이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관(直觀)에 의존해야 한다. 지성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만, 직관은 그와 같은 목적과 이해(利害)를 갖지 않으며, 다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지성이 대상의 외면(外面)만을 보고 방황하면서 관점에 따라 다른 상대성을 면하지 못하는 지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과는 달리, 직관은 대상의 내면(內面)에 깊이 파고들어 절대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

지성의 산물인 자연과학은 지성의 모든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직관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지속·생성(生成)·진화를 파악하여 그것으로써 과학을 보완해야 한다. 한편, 사회에는 폐쇄된 사회와 개방된 사회 2가지가 있다. 전자는 지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정적(靜的)인 것에 지배되며, 사람들은 공동체의 규약을 엄수해야 하므로 자발성과 자유는 최소한도로 억제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폐쇄된 사회에서 벗어나, 개방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랑이며 또한 사랑의 대상이기도 한 하느님을 신비적 직관으로 체험하고 있는 신비가(神祕家)들의 존재에 의하여 직관된다. 개방된 사회는 정적인 것 대신에 동적·진보적인 것을, 획일성(畵一性) 대신에 개인간의 최대한의 다양성과 자유를 소유하며, 또 이 사회에서는 지성이 고안한 유형적(類型的) 도그마는 직관과 계시(啓示)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시간과 자유의지: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이론》(1889), 《물질과 기억》(1896), 《창조적 진화》(1907),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 《사상과 움직이는 것》(1934) 등이 있다. 191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며, 192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철학자

10.  이 인물은 미국의 심리학자 ·철학자.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빌헬름 분트와 함께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소설가이며 비평가로 유명한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형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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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1842년 미국 뉴욕에서 다섯 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소설가이며 비평가로 유명한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형이다. 1855년 유럽으로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보낸 후 186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유명 화가 윌리엄 모리스 헌트에게 1년 반을 지도받기도 하였으나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하면서 화가의 꿈을 접었다. 졸업 후 1872년 30세의 나이에 모교의 강사가 되어 생리학을 강의하였으며 1875년 심리학 강의를 맡았고 이때 미국 최초로 실험적 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878년 시작하여 12년간의 저술로 완성한 《심리학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1890)는 의식의 유동적인 성질에 주목하여 J.로크 이래로 의식을 정적(靜的) ·요소적인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개혁하였다. 의식은 단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슬'이나 '기차'로 표현될 수도 없으며 의식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의 흐름과 같다고 보았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독일의 빌헬름 분트와 함께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프래그머티즘 Pragmatism, a New Name for Some Old Ways of Thinking》(1907)에서는 어떠한 관념이든지 그것을 믿는 자에게 효용이 있다면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진리라고 하는 설을 주장하였고, 《근본적 경험론 Essays in Radical Empiricism》(1904∼1905년경 발표, 사후 1912년 간행)에서는 경험이 바로 실재(實在)이며 세계는 물질도 정신도 아닌 ‘순수경험(純粹經驗)’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스승으로서 교육학자 존 듀이, 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 등을 지도했으며, 미국을 방문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융을 만나기도 하였다. 위의 저서 이외에도 《믿고자 하는 의지 The Will to Believe》(1897),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등을 남겼다. 1910년 미국의 뉴햄프셔주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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