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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지뽐 퀴즈

[020] 지적 허세 뽐내기 좋은 퀴즈 모음(난이도 있는 상식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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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은 더보기 클릭후 확인해 주세요!

 

#미술 #인물

1. 이 화가는 오늘날의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에서 중세 말과 르네상스의 전환기에 활약한 미술가로, 북유럽 미술에서 르네상스를 성취한 최초의 화가이자 최고의 화가이며,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그는 회화, 드로잉뿐 아니라 판화와 미술 이론 분야에서 이후의 어떤 화가도 뛰어넘지 못할 업적을 남겼다. 이 화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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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Düre)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해온 금세공사의 아들로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다 1486∼1489년 M.볼게무트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목판기술을 익혔다. 1490∼1494년 콜마르 ·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14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그린 수채풍경화는 독일예술이 처음으로 도달한 순수풍경화라고 할 만하다. 귀국 후 A.D.라는 사인을 쓰기 시작했다.

1498년 목판의 연작 《묵시록》《대수난》에 착수, 1501년경부터 동식물의 형태학적 연구 시작, 1504년 최초의 인체비례의 수작 《아담과 이브》를 제작했다. 1505년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 《장미관의 성모》《젊은 베네치아의 여인》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전자는 군상처리(群像處理)에, 후자는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의 전개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뒤러는 명석한 퍼스펙티브와 인체표현을 터득하여 점차 독일의 전통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기 고딕의 엄한 구성과 원근법의 결합인데, 뒤러는 독일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의 인체와 의상과의 관계를 보면 명백한데, 다소 생경한 인상은 지울 수 없다.

귀국 후 1511년경까지는 빈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만성도(萬聖圖)》 등 종교화의 대작을 몇 점 제작했다. 1513∼1514년 동판화의 3대 걸작 《기사(騎士) ·죽음 ·악마》《서재의 성(聖) 히에로니무스》《멜랑콜리아》를 발표, 인식 ·윤리 ·신앙을 상징화한 것을 보아도 그의 독일적 본질을 알 수 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에칭은 그 후의 렘브란트의 판화를 예견하게 한다. 1515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연금을 받고, 1520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유화 중의 수작은 《4성도》(1526) 《만성절》(1511) 《자화상》(1498) 외에 몇 폭의 성모자상 및 《요프스트 플랑크펠트》(1521)를 비롯한 초상화들로, 초상화에서는 빛과 그늘의 분열, 종교개혁 ·농민전쟁 시대의 복잡다기한 인격을 반영했다. 유채화 약 100점, 목판 350점, 동판 100점, 소묘 900점은 독일 르네상스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과학 #인물

2. 이 인물은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 진자의 등시성 및 관성법칙 발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지지 등의 업적을 남겼다.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쓴 저서《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는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이단행위로 재판 받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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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

 

1564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음악가인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11세 때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1581년 피사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피사 대성당에서 흔들리는 램프를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였다. 진자의 등시성을 응용하여 맥박계를 고안하기도 했다.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가정교사로 일하다가 습작 논문을 인정받아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 강사가 되었다. 같은 해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으로 옮겼다. 1604년에는 낙하물체의 등가속도운동 법칙을 증명하였다. 그가 피사 사탑에서 실험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나, 실제로는 근거가 없다.

1609년에서는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3배율 망원경을 독자적으로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다가, 달이 평평하지 않고 산과 계곡이 있으며, 은하수에 많은 별들이 있으며 목성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위성이 있다는 등의 사실을 밝혀냈다. 1610년에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천계통보>로 출간하였다. 대학 강사 생활을 그만두고 토스카나 대공의 학자로 일하였으며, 천문관측을 하다가 태양흑점을 두고 크리스토퍼 샤이너와 논쟁했고 그 내용을 <태양흑점에 관한 서한>을 출간했다.

1613년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을 부정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는 편지를 출판하였다가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16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금하고 그의 사상을 지지하거나 변론하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1624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두 우주체계를 공정하게 다루는 조건 하에 그의 연구를 인정해 주었으나, <2개의 주된 우주체계 ―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 ― 에 관한 대화>를 출판하였다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결국 코페르니쿠스 체제를 부정할 것을 법정에서 맹세했다.

그가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후 투옥이 선고되었으나 감형되어 종신토록 자택연금을 당했다. 연금 기간 중에도 천문 관측과 과학 연구를 지속했고, <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을 네덜란드에서 출간하였으며, 제자인 비비아니와 토리첼리를 가르쳤다.


#음악 #인물

3. 이 인물은 독일 출생(1685.2.23 ~ 1759.4.14)의 영국 작곡가이다.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했다.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였으며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 《메시아 Messiah》,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 등을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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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헨델 (Georg Friedrich Händel)

 

헨델은 1685년 2월 23일 독일의 삭소니주 할레에서 태어나, 1759년 4월 14일 영국에서 영면했는데, 이 74년의 전 생애 중 47년간은 영국에서, 27년간은 독일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은 헨델을 법률가로 만들려고 생각하여 할레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헨델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또 천재적인 재능이 보였으므로, 마침내 부친도 마음이 변해 할레의 음악 교사 짜하우에게 배우도록 했다. 헨델은 17세 때 할레 교회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헨델은 선천적으로 가극을 좋아해서 그 방면의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한 두 개의 가극을 만들어 20세 때 「알미라」를 상연했다. 후에 이탈리아 각지를 4년간 여행하여, 이탈리아 음악의 진수를 알 수가 있었다. 1710년 하노바 후작에게 알려져 그 궁정에 초청을 받아 음악장에 취임, 이듬해 가극 「리날도」를 런던에서 상연, 이어 많은 가극을 작곡 상연했으나 당시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극의 작곡과 상연에 온 심혈을 기울인 헨델은 마침내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허약해져서, 요양을 한 뒤에 다시 가극에 몰두했다. 그러나 가극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여기(餘技)라고 여겨졌던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운명을 개척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오라토리오는, 세인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메시아」는 1742년 4월 13일에 더블린에서 초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 성공에 기분이 전환된 헨델은 잇달아 오라토리오를 썼고, 마침내 오라토리오로 위대한 악성의 영관(榮冠)을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오라토리오는 이 시대의 바흐와 견주어 음악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메시아」 · 「이집트의 이스라엘 사람」 · 「유다스 마카베우스」 · 「사울」은 하이든의 「창조」와 함께 불후의 명작이다.

그의 대표적 걸작인 「메시아」 중의 할렐루야 코러스는 하이든이 그 연주를 듣다가 코러스가 높이 합창되었을 때, 무의식 중에 '저편에 신의 영광이 나타났도다’라고 외치며 「천지창조」를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전해진다. 헨델은 1751년에 오라토리오 「예프타」를 작곡하고 있는 동안에 장님이 되었으며, 마침내 1759년 4월 14일, 성 금요일의 아침 8시에 세상을 떠났다. 영국 국왕은 헨델이 음악에 남긴 공적을 기려서 그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시켰다. 바흐와 헨델은 같은 시대의 독일 음악가이면서도 평생 동안 끝내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바흐는 헨델을 깊이 존경하였고, 헨델의 작품을 사모해서 아내와 함께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헨델 [Georg Friedrich Händel] (최신명곡해설 & 클래식명곡해설 - 작곡가편, 2012. 5. 31., 삼호ETM 편집부)헨델은 1685년 2월 23일 독일의 삭소니주 할레에서 태어나, 1759년 4월 14일 영국에서 영면했는데, 이 74년의 전 생애 중 47년간은 영국에서, 27년간은 독일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은 헨델을 법률가로 만들려고 생각하여 할레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헨델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또 천재적인 재능이 보였으므로, 마침내 부친도 마음이 변해 할레의 음악 교사 짜하우에게 배우도록 했다. 헨델은 17세 때 할레 교회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헨델은 선천적으로 가극을 좋아해서 그 방면의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한 두 개의 가극을 만들어 20세 때 「알미라」를 상연했다. 후에 이탈리아 각지를 4년간 여행하여, 이탈리아 음악의 진수를 알 수가 있었다. 1710년 하노바 후작에게 알려져 그 궁정에 초청을 받아 음악장에 취임, 이듬해 가극 「리날도」를 런던에서 상연, 이어 많은 가극을 작곡 상연했으나 당시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극의 작곡과 상연에 온 심혈을 기울인 헨델은 마침내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허약해져서, 요양을 한 뒤에 다시 가극에 몰두했다. 그러나 가극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여기(餘技)라고 여겨졌던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운명을 개척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오라토리오는, 세인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메시아」는 1742년 4월 13일에 더블린에서 초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 성공에 기분이 전환된 헨델은 잇달아 오라토리오를 썼고, 마침내 오라토리오로 위대한 악성의 영관(榮冠)을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오라토리오는 이 시대의 바흐와 견주어 음악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메시아」 · 「이집트의 이스라엘 사람」 · 「유다스 마카베우스」 · 「사울」은 하이든의 「창조」와 함께 불후의 명작이다.

그의 대표적 걸작인 「메시아」 중의 할렐루야 코러스는 하이든이 그 연주를 듣다가 코러스가 높이 합창되었을 때, 무의식 중에 '저편에 신의 영광이 나타났도다’라고 외치며 「천지창조」를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전해진다. 헨델은 1751년에 오라토리오 「예프타」를 작곡하고 있는 동안에 장님이 되었으며, 마침내 1759년 4월 14일, 성 금요일의 아침 8시에 세상을 떠났다. 영국 국왕은 헨델이 음악에 남긴 공적을 기려서 그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시켰다. 바흐와 헨델은 같은 시대의 독일 음악가이면서도 평생 동안 끝내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바흐는 헨델을 깊이 존경하였고, 헨델의 작품을 사모해서 아내와 함께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철학

4. 이것은 지식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철학적 입장을 말한다. 어원은 질문(inquiry)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켑시스(σκέψις)로,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가능성에 의문을 던진다는 의미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지식이란 '정당화된 참인 지식'으로 정의되며, 어떠한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지식이 참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는 이 철학적 입장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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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회의주의

 

회의론이라고도 하며, 소피스트들에게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회의론자인 퓌론은 인간은 보편타당한 판단기준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리가 안다는 것은 단지 습관과 사회의 일시적인 결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떤 판단이나 설명도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중지(epoche)를 주창하였다. 이러한 절대적인 회의주의를 퓌로니즘(pyrrhonism)이라고 한다.


#종교

5. 이것은 헤브라이어의 hasid(경건한 자)에서 유래하며, 널리 유대종교사상에 나타난 <율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키고 있는데, 특히 좁은 의미로는 18세기 초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대중 사이에 널리 퍼진 성속일여의 신앙을 주장하는 종교적 혁신운동을 말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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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하시디즘(Hasidism)

 

창시자는 '좋은 이름의 주인(Baal Shem Tov')'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벤 엘리에제르(1698∼1760)이다. 이 말은 헤브라이어의 하시드, 즉 '경건한' 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광의로는 유대 종교사에 나타난, 율법(律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 지식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어 왔으나, M.부버가 다시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하시디즘에 대한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하시디즘과 선(禪)과의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인데,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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