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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DNA 분석 기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단위의 증거만으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나노는 이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나노스에서 유래된 말로 10억분의 1을 가리키는 미세단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난쟁이
나노는 난쟁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하였다. 1나노초(㎱)는 10억 분의 1초를 뜻한다. 1나노미터(nm)는 10억 분의 1m로서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1, 대략 원자 3~4개의 크기에 해당한다.
2. '이것'은 최승호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무기력한 현대인의 모습을 '이것'에 비유했습니다. 자갈처럼 딱딱한 '이것'의 혀는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순종적인 모습을, 말라붙고 짜부라진 '이것'의 눈은 획일화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했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북어
이 시는 최승호의 시집 『대설주의보』(민음사, 1983)에 수록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한 개의 연이며, 23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앞부분에서는 시적 대상인 '북어'가 객관적인 관찰대상으로 기능하며 그것에 대한 화자의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중반부에서는 현대인의 메마르고 무기력한 삶의 모습에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종결부에서는 '북어'가 객관적 관찰의 대상에서 화자와 동일시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전도된다.
이 시는 '북어'의 특성에 착안하여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태도에 비판적 성찰을 가하는 내용이다. 1~8행에서 화자는 꼬챙이에 꿰어져 식료품 상점에 진열된 북어에서 죽음을 인식한다. 9~12행에서는 메마르고 딱딱한 북어의 혀를 보면서 인간의 '변비증'과 '벙어리'로 표현된 병리적 현상을 자각한다. 13~19행에서는 마르고 찌그러지고 빳빳해진 북어를 '막대기'로 비유하며, 그 '막대기'와 같이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20~23행에서는 시상이 전환되면서 '느닷없이' 북어들이 '화자'를 향해 '너도 북어지'라고 반복적으로 외친다는 내용이다.
이 시의 주제는 비판정신을 잃고 무기력하게 굴종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의욕상실과 획일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화자의 어조는 성찰적이며 풍자성과 상징성을 띠고 있다. 이 시에서 '북어'라는 일상적인 소재는 인격이 부여되어 독특한 해석으로 새롭게 형상화되며 소시민성의 비판이라는 주제에 잘 부합한다. 시의 첫 행인 '밤의 식료품 가게'는 이 시의 시, 공간적 배경이 매우 구체적임을 밝히는데, 이는 시인 최승호가 첫 시집 『대설주의보』에서부터 일관되게 다루어 온 죽음과 도시화의 경험들에 적합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북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시각적으로 화자의 시선에 따라 북어의 대가리-혀-눈-지느러미 등을 순차적으로 제시한다. 청각적으로도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라는 마지막 시행으로 구체화되는 등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3. '이것'은 17세기 프랑스 귀족들 모임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이것'에 자신의 이름이나 신분을 손으로 써서 남의 집을 방문할 때나 파티 초대장 등에 사용했는데요. 이후 인쇄 기술이 발달하며 오늘날 형태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상을 알리는 작은 자기소개서인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명함
옛날 중국에서 대나무를 깎아 이름을 적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인쇄한 명함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고, 외국에서는 주로 이름만 적는데, 한국에서는 이름 외에 주소 ·전화번호 ·직장 ·직위 등을 기입한다. 명함의 모양 ·크기도 나라마다 여러 가지인데,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영국 ·미국에서는 여성용 명함이 크다. 재질도 종이에 국한하지 않고, 인화지나 플라스틱을 사용한 것, 얇은 철판을 이용한 것도 있다. 이 밖에 자신의 컬러사진을 곁들인 명함도 등장하는 등 다양해지고 있다.
명함은 자기를 설명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므로, 명함에 대한 약속사항을 지켜야 한다. 이 약속사항은 한국보다도 유럽 ·미주 국가들이 더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예컨대, 자기 스스로 방문한 것을 나타낼 때에는 명함의 모서리를 꺾어 둔다. 이 경우 이름의 첫글자 쪽을 꺾는 것이 보통이다. 타인의 명함을 부탁받았을 때에는 꺾어서는 안 된다. 명함만을 두고 올 때에는 방문의 뜻을 간단히 적어 둔다. 경사(慶事)나 상사(喪事) 등에 외국에서는 ‘P.r.(문안)’, ‘P.f.(축하)’ 등의 약칭도 정해져 있다. 또 생일에는 ‘A Happy birthday to you’, 크리스마스에는 ‘A Merry Christmas’, 여성에게 꽃을 선물할 때에는 ‘In loving memory’ 등으로 적는 것이 예의이다.
사교장에서도 명함의 교환은 친교를 약속하는 뜻이 있으므로, 단순히 이름을 알릴 때에는 명함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 명함을 교환할 때에는 아랫사람 쪽에서 먼저 내며, 받은 사람은 그것을 잘 보고 난 다음 자기 명함을 건넨다.
4. '이것'은 조선 시대 무과에 낙방한 사람들을 가리키던 말인데요. 이들이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무예를 연마하는 모습이 백성들의 눈에는 마치 노는 것처럼 보여 이후 놀고먹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돈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한량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걸쳐 특정한 사회계층을 가리키던 말.
그러나 전체시기에 걸쳐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서 한량이라고 부르던 사회계층은 직첩(職牒) ·직함(職銜)은 있으나 직사(職事)가 없는 무직사관(無職事官)과 직(職) ·역(役)이 없는 사족(士族)의 자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량은 한량인(閑良人) ·한량지도(閑良之徒) ·한량 품관(品官) ·한량 유사(儒士) ·한량 유신(儒臣) ·한량 기로(耆老) ·한산자제(閑散子弟) ·무역인(無役人) ·전함(前銜)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사족(士族) 자제 가운데 피역(避役)의 수단으로 호적과 군적에 등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 ·역이 없는 미사(未仕) 한량자제에 대하여 고려 말부터 국가는 그들을 호적에 등재하고 강제로 추쇄(推刷)하여 군역에 충당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이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세종 때 그들을 중앙과 지방의 여러 병종(兵種)에 속하게 하고, 세조 때부터는 단일 병종에 귀속시키려는 정책이 계속되었다.
또, 사족자제로서 집안에 경제력이 있어 궁술 등 무예를 닦은 무역(無役) 한량자제에 대하여 국가는 그들의 무예를 국방력에 흡수하고자 세종 때부터 그들에게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제수하였고, 중종 때부터는 그들에게 무과(武科) 응시를 허용하여 무인(武人)으로서의 성격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한량에 대한 의미가 무과 및 잡과 응시자를 가리키거나, 호반(虎班) 출신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의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또한 궁술의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5. '이것'은 특정 삼품을 구매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쉽게 살 수 없는 명품을 선호하는 것은 대표적인 이것 현상 중의 하나인데요. 까마귀 떼 속에서 혼자 떨어져 고고하게 있는 백로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백로효과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스놉(스노브) 효과(Snob effect), (= 속물효과)
특정상품에 많은 사람이 몰리면 희소성이 떨어져 차별화를 위해 다른 상품을 구매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좋게 말하자면 우아한 백로처럼 남들과 다르게 보이려는 심리를 반영한다고 해서 백로효과라고 하지만 비판적으로는 "속물 효과" 혹은 속물을 뜻하는 영어인 'snob'을 사용하여 스놉효과 (snob effect)라고도 한다.
흔히 희귀한 미술품, 고급가구, 의류나 한정판으로 제작되는 재화에서 이런 효과를 볼 수 있다. 밴드왜건효과를 주장한 미국의 하비 라이벤스타인이 발표한 이론이지만 밴드왜건 효과와는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6. 남의 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 이것은 술자리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서로 공경의 뜻을 표하면서 술을 주고받는 것을 이것이라 했는데요. 술자리에서 반역을 모의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일이 잦아지면서 점차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게 됐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수작 (酬酌)
酬 : 술따를 수
酌 : 술따를 작
수작(酬酢)으로도 쓴다. 수(酬)는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여 따라주는 것이고 작(酌) 또는 작(酢)은 손님이 답례로 주인에게 술을 따르는 것이다. 술을 따르는 동작인 두 글자가 합쳐져 술잔을 주고받는 행위, 빈주 관계에서 서로 응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이 말은 후에는 어떤 음모를 꾸미거나 속셈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남의 말이나 행동을 비하하거나 함부로 낮추어 대하여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주로 ‘수작을 부리다’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7. '이것'은 앞에 지나간 수레바퀴의 자국이라는 뜻으로 이전 사람의 그릇된 일이나 행동의 자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흔히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것'을 밟지 말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전철(前轍)
앞에 지나간 수레바퀴의 자국이라는 뜻으로, 이전 사람의 그릇된 일이나 행동의 자취를 이르는 말.
8. 이것은 조선 시대 왕에게 진상품으로 올리던 생선 중 하나인데요. 당시 이것은 매우 귀해서 따로 관리하던 관청까지 둘 정도로 특별관리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주로 서해한에서 잡히며, 말려서 육수를 낼 때 쓰거나 젓잘로 담그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밴댕이
청어목 청어과의 바닷물고기. 멸치와 비슷하게 생겼고 회, 구이, 젓갈 등으로 사용되며 5~6월에 가장 맛이 좋다.
우리말에 '오뉴월 밴댕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변변치 않지만 때를 잘 만났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이처럼 밴댕이는 산란기를 맞아 기름기가 오르는 음력 5~6월에 가장 맛이 좋다. 밴댕이는 주로 회, 구이 등으로 먹는데, 잡은지 12시간 정도가 지나면 젓갈용으로 사용된다.
흔히 속이 좁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을 '밴댕이 소갈머리(소갈딱지) 같다'고 하는데, 실제로 밴댕이는 그물에 잡힐 때 받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몸을 비틀며 떨다가 곧 죽어버린다. 그래서 어부들조차도 살아있는 밴댕이를 쉽게 볼 수 없다. 살이 무르기 때문에 쉽게 부패해 10년 전까지만 해도 뱃사람들 외에는 횟감으로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냉동, 냉장 기술의 발달로 횟감으로 먹기도 한다.
9.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요 과일의 맛으로 절기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중 가을의 기운이 완연한 절기인 백로에는 이것의 단맛이 가득하다 해 이것의 절기라 불렀는데요. 중복에는 참외, 말복에는 수박, 처서에는 복숭아, 백로에는 이것이 제맛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이 과일은 무엇일까요?
정답 : 포도
포도·포도덩굴이라고도 한다. 덩굴손이 있으며, 종에 따라서 연속 또는 단속적으로 잎과 마주난다. 길이 3m 내외이다. 암수딴그루 또는 양성주로 5∼6월에 원추꽃차례로 노란빛을 띤 녹색 꽃이 달린다. 꽃잎은 5개이며 녹색으로, 위쪽이 융합한다.
암그루에서는 씨방 상위의 암술과 기능이 없는 화분(花粉)을 가진 5개 남짓한 수술로 이루어지며, 암술과 수술 사이에는 화반(花盤)이 있다. 수그루에서는 기능이 있는 화분을 가진 수술이 달리지만 암술은 없다. 양성주에서는 암술·수술이 모두 기능이 있다.
열매는 액과로 8∼10월에 익는다. 과피는 짙은 자줏빛을 띤 검은색, 홍색빛을 띤 붉은색, 노란빛을 띤 녹색 등이며 과형(果形)도 공 모양, 타원 모양, 양 끝이 뾰족한 원기둥 모양 등 다양하다.
10. 우리나라 최초의 모금 캠페인은 1896년 이것 건립을 위해 시작됐는데요. 캠페인을 주도한 서재필 박사는 조선이 자주적인 국가임을 상징하는 이것의 필요성을 알리며,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두 달 만에 목표 금액 5,000원이 모여 다음 해에 완공된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독립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석조문. 사적.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문으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사대외교의 표상으로 인식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 곧 1896년(건양 1)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였는데, 그 뒤 고종 황제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다.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이 문의 건축 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땄다. 다만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를 쌓는 수법도 이전의 성벽을 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설계는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하였고, 조선인 목수가 시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를 하고, 조선인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공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은 화강석 쌓기로 건립하였는데, 가운데 부분에는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문 안쪽의 왼쪽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李花]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쓴 글씨와 함께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이전의 흔적인 서울영은문주초 2개(사적 제33호)가 서 있다.
1917년에 수리공사를 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받침 부분이 내려앉을 위험이 있다고 하여 공사비 4000원을 경성부에 위탁하여 크게 수리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벽체 안쪽에 새로운 재료로 강조한 철근콘크리트를 보강하였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가로·세로 각 70㎝ 크기의 기념동판을 묻었다. 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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