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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유 퀴즈 온 더 블럭 퀴즈

[032] 유 퀴즈 온 더 블럭 퀴즈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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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초기 대표 법의학서로 활용된 이것은 1341년, 원나라의 '왕여'라는 법의학자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를 바탕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폭행에 의한 사망을 구분하는 방법, 독살 여부를 구분하는 방법 등 현대 과학 수사를 연상케 하는 정밀한 수사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죽은 자의 억울함을 없게 한다'라는 뜻을 가진 이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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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무원록(錄)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이용되었다. 세종은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는 작업의 하나로서 최치운()에게 주해하도록 하여 1440년(세종 22) 《신주무원록()》을 간행하고 실제 검시() 등에 이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원서 자체에 이해하기 힘들거나,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점이 많았기 때문에 영조는 구택규()에게 명하여 옛 주해본의 잘못된 곳을 바로잡고 빠진 곳을 보충하게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다가, 그 아들인 구윤명()이 이어받아 빠진 내용을 보태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정조는 그것을 검토한 후 형조판서 서유린()으로 하여금 율학별제() 한종호() 등 당시의 법률 전문가들과 함께 내용을 더욱 보완하여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1792년(정조 16) 교서관에서 3권 2책의 《증수무원록언해()》가 간행되었으며, 구윤명이 보완한 책도 1796년(정조 20) 교서관에서 1책의 《증수무원록대전》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증수무원록대전》을 통해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앞머리에 편찬 경위와 참여자 ·범례 등을 두었으며, 상편에는 살인사건 조사에 대한 총설, 검시의 도구 및 절차와 방법, 보고서 작성 방식 등이 실려 있다. 하편에는 검시의 기준이 되는 사망 내용을 실었는데, 익사 ·구타 ·중독 ·병환 등 22가지의 원인별로 구분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그 각각을 다시 구체적인 원인에 의해 자세히 나누어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중독사는 생전에 중독된 경우, 사후에 중독된 것처럼 가장된 경우, 벌레의 독에 의한 것 등 10여 개 이상으로 구분되어 있다. 말미에는 사람의 골격을 논한 글 등 참고 사항이 추가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재정리된 책은 곳곳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광무 연간까지 계속 이용되었으며, 그 방법에 따른 구체적 검시 보고서인 검안()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언해본은 18세기 말의 국어와 그 표기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2.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이 말은 20세기 프랑스 법의학자인 이 인물이 남긴 명언입니다. 이는 범죄자가 현장을 드나들 때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 떠난다는 뜻으로 이 인물의 이름을 딴 법칙은 오늘날 과학 수사의 기초로 쓰이고 있는데요. 프랑스의 셜록 홈스라 불리는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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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에드몽 로카르

 

에드몽 로카르(프랑스어: Edmond Locard, 1877년 12월 13일 ~ 1966년 4월 4일)는 프랑스의 범죄학자이다. "법과학의 창시자" 또는 "프랑스의 셜록 홈즈"라고 불린다.


3. 이 곳은 1590년,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당시 이곳에 소장된 금은보화를 훔치려던 도둑들이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방화를 저지른 건데요. 다행히 초기 진압으로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결국, 임진왜란을 겪으며 이곳 전부가 불타버리는 국난을 당했습니다.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조선 왕실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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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종묘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왕실 제례 건축으로서 공간계획 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보존 상태가 우수하다. 14세기 말에 창건되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세기 초에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4. 조선 시대 보부상들이 쓰던 패랭이 모자에는 두 개의 새하얀 이것이 달려있습니다. 고려 말 태조 이성계가 전투 중 부상을 당했을 때 보부상에게 이것으로 지혈을 받게 되었고, 이후 보부상들이 패랭이 모자에 이것을 부착하게 됐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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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목화솜

패랭이 모자

패랭이 모자는 가늘게 오린 댓개비로 성기게 얽어 만든 것으로, 모자집과 테의 구분이 분명하며 모정()은 둥글다.

갓의 발달과정에서 추측해 보면, 모정에서 테까지 민틋하게 내려간 방립()에서 완성된 형태의 갓, 즉 흑립으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에 속하는 것이다. 흑립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서인()의 모자로 인식됨에 따라, 패랭이의 용도는 점차 국한된다.

역졸, 보부상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조선 말기까지 사용하였는데, 역졸은 흑칠()한 것을 쓰며, 보부상은 목화송이를 큼직하게 얹어서 썼다. 1895년에 천인층에도 흑립을 쓰도록 하고 패랭이 쓰는 것을 금하였으나, 천인들은 흑립을 감히 쓰지 못하고 계속 패랭이를 썼다고 한다.

이 패랭이는 흑칠()에 영()과 붉은 깃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역졸 계층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이것은 1431 세종대왕이 창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대입니다. 이들은 화재 발생 시 종을 쳐 백성들을 대피시킨 후 물을 퍼 나르고 물에 적신 천으로 화재 진압을 했는데요. 또한 높은 곳에 올라 화재를 감시하고 방화범을 잡는 임무도 했다고 합니다.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뜻의 이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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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금화(), 금화대 또는 금화군

 

병조() ·의금부() ·형조() ·한성부() ·수성금화사() 및 5부()에서 당직하는 관원은 화재를 단속하기 위해 순찰하는데, 궁궐 내에 화재가 발생할 경우에는 대종()을 쳐서 궁내에 있는 자는 달려가서 불을 끄게 하였다. 그러나 장병들은 당직하는 직소()를 떠나지 못하고 출번()한 장병들은 소속위()에, 모든 관사의 관원은 각기 조방()에 집합하여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5부 내에 불이 났을 경우에는 병조 ·의금부 ·한성부 ·형조 및 수성금화사의 관원들이 저마다 부원을 데리고 달려가서 불을 끄고, 일반 백성들은 1통()마다 금화판()을 발급받아 통민()을 인솔하고 소화작업에 나섰다. 의

금부는 화재감시인을 정하여 종루에 올라가서 간망()하게 하되 이궁()이나 관청사()에서 화재가 일어났을 때에는 종을 친다. 풍세()가 심하면 수성금화사가 방() ·이() ·각 호()로 다니며 방울을 흔들어 순찰 경계하며 화재에 대비하였다.


 

 

6. 이것은 폭약을 터트릴 때 불을 붙이는 선을 말합니다. 오늘날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흔히 화재 현장 감식 후 발화 원인이 이것 역할을 했다고 표현하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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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도화선()

 

1.폭약이 터지도록 불을 붙이는 심지

2.사건이 일어나게  직접적인 원인.


7. '이곳'은 기원전 212년 진시황이 건립하기 시작한 대규모 황궁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곳'은 가로 650m 세로 115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초나라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 '이곳'에 불을 질렀으나 3개월간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오늘날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집을 비유할 때 쓰이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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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아방궁

 

산시성[西] 시안[西] 서쪽 아방촌()이라는 한촌()에 있다. 시황제는 함양궁()을 비롯하여, 그의 손으로 멸망시킨 육국()의 궁전을 본뜬 육국궁 등 많은 궁전을 지어 미인과 즐겼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셴양[]의 대안()에 더 큰 궁전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 전전(殿)이 아방궁으로, 규모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동서 약 693m, 남북 약 116.5m에 이르는 2층 건물에 판축기법으로 쌓은 기초의 동서 길이가 1,320m, 남북 420m, 높이 8m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

건설에는 죄수 70만이 동원되었으나 시황제의 생전에는 완성되지 않아 2세 황제에 의해 나머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셴양 부근에 세워진 수백에 달하는 궁전군(殿)은 2층으로 지은 복도와 담장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길로 종횡으로 이어져 아방궁에서 웨이수이강[]을 건너 직접 셴양이나 난산[]의 정상에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황제들은 그 사이를 오가며 자기의 소재를 비밀로 하였다 한다. 아방궁을 포함한 이 궁전군은 BC 207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불에 탔는데 불길이 3개월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8. '이것'은 타는 불에서 튀는 작은 불똥을 의미합니다. 불이 활활 타오를 때 사방으로 튀면서 날리는 모습에서 유래된 말로 어떤 물건이 내놓기 무섭게 금방 팔리거나 없어질 대를 가리켜 '이것나게 팔렸다'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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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불티

1.타는 불에서 튀는 작은 불똥.

2.소요나 말썽의 원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9. 이 인물은 1908년 숙명여고에 부임한 국어 교사입니다. 개화기 국어학자인 이 인물은 백성들이 편하게 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말 문법을 최초로 정립했는데요. 말의 소리, 국어 문법 등을 저술했으며, 훈민정음을 한글이라 처음 이름 지은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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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주시경

 

황해도 봉산군 무등골에서 태어난 선생은 1887년 상경, 배재학당과 이운학교를 거쳐 신학문을 공부하던중 1896년 서재필선생을 만나 국어 연구와 보급운동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896년 4월 창간된 독립신문에 국문전용 및 띄어쓰기를 실천, 근대민족운동에 기여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국문동식회를 조직, 해방후 한글학회로 발전하는데 초석을 다졌다.

협성회와 독립협회 등에 참여해 국민계몽 및 국권회복 운동에 앞장섰으며 대한국어문법과 국어문전음학, 국문초학, 국어문법, 국문연구안, 말의 소리 등의 저서를 출간, 한글발전에 기여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보성중학교에서 조선어강습소를 열어 후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중 지병이 악화돼 1914년 7월27일 서울 수창동 자택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저서로는 《국어문법》 《월남망국사》 《한문초습(漢文初習)》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 《국문초학(國文初學)》 《말의 소리》 《주시경유고》 등이 있다.


10. 조선 후기 유행한 민요인 <파랑새요>는 이 인물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슬퍼하고 민중의 절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입니다. 이 민요에는 '녹두꽃'이라는 가사가 있는데요. 이는 이 인물이 어렸을 때부터 몸집이 작아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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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전봉준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하지만 어진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전창혁은 탐관오리였던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반항하다 곤장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몸을 담고 이후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가 되었다.

1892년(고종 29)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전봉준은 농민 대표와 함께 이를 시정(是正)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재산과 곡식을 배분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았다. 이 사태를 알게 된 조선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처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용태가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리고 탄압을 시작하자 전봉준은 다시 대규모의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동학교도와 농민 대중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였고 '척왜(斥倭)ㆍ척양(斥洋), 부패 관리 타파' 등의 강령을 내세워 관군(官軍)을 무찔렀다. 동학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홍계훈(洪啓薰) 등을 대파하고 진군을 거듭해 음력 4월 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동학농민운동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중앙 정부에서는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할 것을 우려해 청나라 군대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들어 한반도에 진주하여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다. 이를 알게 된 동학군은 '불량한 양반의 죄를 조사하여 벌줄 것'과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불법적인 세금을 없앨 것' 등의 내용을 담은 12개 조의 시정 요구책을 확약받고 휴전하게 되었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해체되었음에도 일본군과 청군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을 벌였으며,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처럼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숨기지 않는 일본에 격분하여 동학농민군은 재차 모여 봉기하였다. 그러나 이 항일 전쟁은 대부분의 농민군이 사살당하면서 대패로 끝이 났다.

이후 전봉준은 은신하여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고 준비하던 중 옛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었다. 전봉준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죽음 이후 백성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를 불러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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