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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땡전 한 푼 없다'라는 속담에서 땡전은요. 조선 시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고자 발행했던 '이 화폐'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집니다. '이 화폐'는 기존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100배 값이지만 실제 가치는 약 다섯 배에 그치며 조선 경제를 무너뜨린 원인이 됐는데요. 화폐 가치가 낮아 '땡전', '땅돈'이라 낮춰 불렸던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당백전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했고 이듬해에 당오전(當五錢)을 주조, 통용하게 했다. 이 당백전은 3년간 통용되었는데, 법정 가치는 상평통보의 1백 배였으나, 실제 가치는 5 내지 6배에 지나지 않는 악질 화폐였다.
당백전은 돈의 부족과 물가 앙등으로 화폐의 구실을 못하게 되어 그 주조를 중지했으며, 1867년 청나라의 화폐를 수입함에 따라 거세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당백전의 ‘당’을 되게 발음하여 ‘땅돈’이 되었고 다시 ‘땡전’이 되었다.
2. 2020년 특허청에서는 발명의 날을 기념해 국민 800여 명을 대상으로 <100만 냥이 있다면 투자하고 싶은 우리 선조들의 발명품>을 조사했습니다. 1위는 무엇일까요?
1. 동의보감 2. 상감청자 3. 온돌 4. 홍삼
정답 : 3.온돌
철기 시대부터 사용해 온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장치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기가 방바닥 아래의 빈 공간을 지나면서 구들장을 덥히고, 따뜻해진 구들장의 열기가 방 전체에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 난방이 된다. 여기서 구들장은 방바닥 아래에 깔아두는 넓적한 돌을 가리킨다.
3. 이것은 1946년 프랑스의 디자이너가 처음 발표한 옷으로 남태평양 마셜제도에 있는 이 섬의 이름을 따 지었습니다. 이 섬은 미국이 원자포탁 실험을 한 곳으로 알려진 이 섬은 무엇일까요?
정답 : 비키니
위아래가 떨어진 여자 수영복을 가리키는 이 말은 본래 태평양 상에 떠 있는 작은 섬의 이름에서 나왔다.
비키니 수영복은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드가 1946년 7월 9일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발표한 옷이다. 이 패션쇼가 있기 4일 전인 7월 5일에 미국이 태평양 상에 떠 있는 비키니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했는데, 디자이너는 이 수영복이야말로 패션의 원자폭탄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 옷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최초의 비키니 수영복은 신문지를 도안해서 프린트한 무늬의 면 수영복으로 당시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요즘은 위아래가 떨어진 투피스 모양의 여자 수영복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1961년에 (주)한국샤크라인의 전신인 백화사가 상어표 수영복이란 브랜드로 수영복 시장을 열었다.
4. 이것은 과녁의 한 가운데를 뜻하는 말로 과녁 중앙에 고니를 그려 넣은 데서 유래됐습니다. 고니는 높이 날아 명중하기 어려운 새였기 때문에 과녁에서 한가운데를 맞히면 '이것을 맞혔다'라고 표현하는데요. 오늘날 어떤 문제의 핵심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이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정곡(正鵠)
과녁의 한 가운데 표적을 정확하게 맞추다.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음. 옛날 과녁 가운데에 표적으로 고니를 그려 붙였음.
5. 우리나라 최장 연재 기록을 가진 만화는 1955년부터 2000년까지 45년간 연재한 고 김성환 화백의 이 작품입니다. 단 네 컷으로 정치나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했던 이 작품은요 우리나라 현대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으며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 이 작품은 무엇일까요?
정답 : 고바우 영감
한국의 대표적인 시사만화로, 고(故) 김성환 화백이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약 50여 년간 주요 신문사에 연재하여 단일 만화로는 최장수 연재 기록을 세웠다. 등록문화재 제538-1, 2호.
6. 조선 시대는요 조정의 소식을 알려주는 신문인 조보가 있었습니다. 조보는 왕의 비서실인 이 기관에서 조정의 주요 소식들을 필사해 매일 아침 배포했는데요. 조선 시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이 일기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기관은 어디일까요?
정답 : 승정원
조선 시대 관청으로 국왕의 비서 기관이다. 총책임자인 도승지가 이조를 맡고, 좌승지가 호조, 우승지가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아 6조와 협의하며 왕을 보필했다. 승정원의 업무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승정원일기》가 남아 있어 역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7.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면허 법규는요 1908년에 제정된 '이것' 영업 단속 규칙입니다. '이것'은 1894년에 국내에 처음 보급된 것으로 이 법령에는 '이것' 운전자의 연령, 탑승정원, 운행속도, 두 대가 마주쳤을 때 길을 비키는 법 등이 명시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 인력거
자전거바퀴처럼 생긴 두 개의 차륜 위에 사람이 앉을자리를 만들고 포장을 씌운 것이다. 인력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94년(고종 31)으로 일본인 하나야마(花山帳場)가 10대를 수입, 서울 시내 및 서울과 인천간에 운행한 것이 시초이다.
초기의 인력거는 차 위에 고정시킨 네 귀의 기둥에 장막을 쳐서 지붕을 삼은 간단한 구조였으나 뒤에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여름철 등에는 벽과 지붕을 뒤로 젖히고 운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바퀴도 처음에는 철테 바퀴를 그대로 써서 몹시 흔들렸으나, 뒤에 통고무 바퀴가 등장하였고, 압축공기를 이용한 타이어가 나온 것은 191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또 초기의 인력거꾼은 일본인이었으나 뒤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
인력거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도시에까지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초기에는 관리·중산층·노약자·기생 등이 가마를 대신하는 교통수단으로 많이 이용하였다. 초기의 승객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도 점차 늘어났다. 특히 기생들은 요긴한 교통수단으로 애용하였다.
당시 풍습은 기생이 요릿집에서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연석에 나올 기생 이름을 대면 요릿집에서 기생조합에 통보하고 이곳에서 인력거를 기생집에 보내어 술집으로 나가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염집 부인들이 탈 때에는 기생으로 오인받지 않으려고 차 앞의 장막을 내려서 승객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하였다.
또 인력거꾼은 요즈음의 택시운전사나 우체부처럼 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초행자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나 언덕에서도 운행이 가능하여 중산층의 대중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1930년대에는 신문사에도 자가용 인력거를 두고 기자들이 이용할 때마다 전표를 떼어 주었다.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인력거를 뒤에서 미는 사람을 따로 붙였는데 이를 ‘두패지른다’고 일렀다. 인력거꾼은 뜀박질을 잘해서 서울 장충단에서 벌어진 ‘대운동회’에 참가, 장거리 경주에서 일등을 하는 일이 많았다.
1911년 말 현재 전국의 인력거는 1,217대(당시 자동차는 2대, 객마차는 110대였다.)였으나 1923년에는 4,647대로 늘어났으며, 서울에서는 약 37%인 1,816대가 운행되었다. 인력거를 이용할 사람은 오늘날의 콜택시처럼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어서 불렀으며, 부유층에서는 자가용을 따로 마련하였다.
1924년 당시 자가용 인력거는 1,509대인데 소유자를 살펴보면 한국인(936대), 일본인(482대), 프랑스인(77대), 기타 외국인순이었다. 한편 영업용 인력거는 소유자와 종업원인 인력거꾼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소유자들이 조합을 결성, 운행하였다. 1908년 인력거의 영업허가, 인력거꾼의 자질, 운임, 속도, 정원, 두 대가 마주쳤을 때 길을 비키는 법 등을 정한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었다.
1914년부터는 인력거의 운행감독을 각 경찰서에서 맡게 되어 일정한 날짜에 차체수리상태 및 인력거꾼의 복장검사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인력거꾼의 복장은 업종의 성질상 개선되기 어려웠다. 특히 여름철에는 땀이 비오듯이 쏟아져 복장단정을 운위할 형편이 못 되었고, 심지어 더위와 땀 때문에 맨발로 달리는 사람도 많았다.
인력거는 1912년부터 등장한 임대승용차(택시)에 밀려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승객확보를 위하여 1922년 11월 10리에 80전이던 삯을 60전으로, 하루 전세료도 5원에서 4원으로 낮추었으나 큰 효과가 없었다.
1931년 현재 자동차는 4,331대로 증가한 반면 인력거는 2,631대로 줄어들었다. 인력거꾼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고 수입도 지나치게 영세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인력거부조합(人力車夫組合)도 결성되었으나, 근무조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또 인력거꾼과 승객 사이의 요금시비도 끊이지 않아 한때는 인력거승차표를 발매한 일도 있다. 서울의 경우 인력거는 광복 무렵부터 자취를 감추었으나 일부지방 도시에서는 6·25전쟁 이후까지 운행되었다.
8. 이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독일의 공격에 대비해 국경지대에 건설한 벙어시설인데요. 이것의 이름은 건설을 주도한 프랑스 국방 장관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오늘날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한계선을 의미하는 이것은 무엇인가요?
정답 : 마지노선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선이란 의미로, ‘마지노선(Maginot line)’이라는 이름은 이 요새선(要塞線)을 만들 것을 창안한 당시의 프랑스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1877~1932)의 이름을 딴 것이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하여 독일군의 전차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국경을 따라서 긴 요새선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북서부 벨기에 국경에서 남동부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총연장 약 750km의 요새를 만들었다. 1927년에 착수하여 10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60억 프랑이나 들었다. 당대 최고의 축성기술이 총동원되었으며, 주거지역ㆍ보급품 창고ㆍ방어선을 연결하는 지하철도로망까지 연결되어 있었을 정도로 매우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40년 5월, 독일 기갑병단이 마지노선을 우회해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로 진격함으로써, 결국 엄청난 기술과 인력, 그리고 자금으로 만들어진 프랑스 최고의 요새는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에는 ‘최후방어선’, ‘넘어서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9. 전쟁 중에는 적국의 음악 연주가 금지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 곡은 예외였다고 합니다. 영국은 자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승리의 상징인 'V'의 모스부호 리듬과 도입부 리듬이 같은 이 곡을 방송에서 틀었는데요. 올해로 탄생 250주년인 독일의 천재 작곡가가 만든 이 곡은 무엇일까요?
정답 : 운명(운명 교향곡)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졌다. 교향곡 제3번 《영웅》(1804)이 완성된 뒤 곧 쓰기 시작했으나 이보다도 먼저 교향곡 제4번(작품번호 60, 1806)이 완성되고 그 후 본격적인 작업이 계속되어 마침내 1808년에 완성,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 곡의 이름은 제1악장 첫머리의 동기에 대해 베토벤 자신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한 데 연유하고 있다. 베토벤의 귀에 이상이 생기고, 영원한 애인으로 알려진 테레제 브룬스비크와의 파국, 나폴레옹의 침공 등 시련이 겹쳤던 시대의 작품이다. 기법적으로도 뛰어나 마지막 악장에서는 트롬본 3, 피콜로 1을 곁들여 빛나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10. '이 동물'은 새끼를 위해 먹이를 멀어다가 둥지에 쌓아두는 습성이 있어 예로부터 재물의 상징으로 통했습니다. 여기서 유래된 '이것 살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쩍 느는 살림을 말하는데요 머리에 달린 뿔처럼 생긴 깃털이 특징인 '이 동물'은 무엇일까요?
정답 : 부엉이
올빼미목 올빼미과 부엉이류의 새를 통틀어 이르는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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