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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지뽐 퀴즈

[007] 지적 허세 뽐내기 좋은 퀴즈 모음(난이도 있는 상식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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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은 더보기를 클릭 후 확인해 주세요!

 

#철학

1.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인 후기 대화편이다. 이 책은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저서일 뿐 아니라 그의 저서 '법률'과 함께 가장 방대한 저서이기도 하다.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1권은 초기 저작으로 스크라테스의 사상을 설명하는데 머물러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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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국가론(국가 혹은 정의에 대하여)

 

플라톤의 저서로 이 책은 보통 '국가 혹은 정의에 대하여'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서는 플라톤의 교사 시절의 작품으로 40~60세 사이에 씌어졌고, 전체가 10권으로 되어 있다. 중기 플라톤의 대략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종일관하여 “정의란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 삶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관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폴리스)의 성립 그 사태를 문제로 하는 일, 결국 국가제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이상의 물음에 당장 부딪히는 국가라는 '큰 문자'속에서 고찰한다라는 방법론적인 필요에서 생긴 것이다.

거기에는 왜 우리의 존재, 다시 말하면 영혼의 상태(작은 문자)와 국가의 상태라는 것이 비슷하게 비례하여 이야기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또 국가라는 존재가 각각 여러 가지로 제 능력을 자신 속에 포함하면서 그 자신은 결코 그들의 제 능력의 단순한 총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의 인간(결국 영혼)으로서 또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정의란 국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는 또한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 있어서 왕이 되어 통치하거나 혹은 현재 왕으로 불리거나 권력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참으로 충분히 철학을 하지 않는 한, ……국가에도 인류에도 불행은 그치지 않는다. 철학자란 이데아를 인식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철인왕(哲人王)은 무엇보다도 먼저 선(善)의 이데아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의 이데아는 태양과 같아서, 인식되는 것에, 진리를 인식하는 사람에게 그 능력을 부여한다라고 주장한다.


#종교#인물

2. 이 인물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고 이삭을 낳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신약성서에서는 경건한 아내의 모범으로 신앙인의 표본으로서 인용되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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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사라(Sarah)

 

‘여왕’, ‘여주인’이란 뜻. 원래의 이름은 ‘사래’(창 11:29)이며,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이복누이라 소개했다(창 20:12). 그녀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과 결혼하였고,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향할 때 사라는 65세 가량되었다. 사라는 미모가 아리따운 여자였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라함과 함께 애굽으로 갔을 때, 거기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죽을까 하여 아내를 누이로 속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바로는 사라를 궁으로 불러 들이고 아브라함에게는 재물을 주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로 바로는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되고 아브라함 일행은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창 12:13-20). 몇 년 후,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의 궁정에서도 비슷한 실수를 하였다(창 20:1-18). 매번 하나님의 강권적 개입으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나약했던 아브라함은 이방의 왕들에게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한편, 하나님으로부터 후사에 대한 언약(창 15:4)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75세가 되기까지 아이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아브라함을 설득하여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첩으로 삼아 후손을 보게 하였다. 당시 이렇게 얻은 자식 이스마엘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식인 동시에 상속인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후사가 아니라 사라를 통한 후사를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사라는 90세에 이삭을 낳았다.

이때 그녀의 이름도 사래에서 사라로 바뀌었다(창 17:15-27). 몇 년 후, 이삭이 젖 떼는 축하 잔치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을 계기로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하였다. 그후 사라는 127세에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죽었고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창 23:1-2). 이사야는 사라를 선택받은 백성의 어머니로 언급한다(사 51:2). 그리고 신약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 중 하나로(히 11:11), 베드로는 순종하는 아내의 표상으로 인용하여(벧전 3:6), 아내 된 여성도들에게 모범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역사

3. 이것은 1799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인들이 이집트 도시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 진지 구축 중 발굴한 비석조각이다. 이 비석조각에는 세 가지 고대 언어로 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다. 이 조각의 진품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으며, 카이로 국립박물관에 유일한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비석조각의 이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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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로제타 석(Rosetta)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포병사관 부샤르가 나일강 하구의 로제타 마을에서 진지(陣地) 구축 중 발굴한 흑색 화강섬록암의 비석조각.

로제타석은 문자가 가득 새겨진 가로 72㎝, 높이 114㎝, 두께 30㎝의 화강섬록암.

1799년 7월15일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대 소속이던 피에르 부샤르대위가 알렉산드리아에서 56㎞ 떨어진 지중해변의 작은 마을 로제타(아랍어로는 라시드)에서 발견했다.

로제타석에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 hieroglyph), 아랍인들이 사용했던 민용문자(디모틱 Demotic: 상형문자의 필기체), 그리스문자 등 세가지 문자로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발견 당시에는 아직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해독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비석의 문자해독이 그 열쇠라고 생각되어 매우 소중하게 보관되었는데 1801년 아부키르 전투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가 평화조약 대가로 영국에 넘겼다. 현재는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제타석 해석의 기초는 영국의 이집트학자 토머스 영이 닦았다. 그는 새나 동물모양의 문자에서 얼굴을 향하고 있는 방향을 연구해 부호읽는 법 등을 알아냈다.

이후 프랑스의 샹폴리옹(Jean Francoise Champollion)은 영의 뒤를 이어 해석에 착수해 1822년 9월14일 26개 이집트 상형문자의 의미와 음가, 용법을 밝혀냈다. 그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음가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와 뜻을 표현하는 표의문자, 그리고 그림문자 등 세 가지가 복합돼 이뤄졌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문학

4.이 소설은 작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자신의 1890년 아프리카 여행 겸험을 토대로 쓴 중편소설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시대를 앞선 작품으로 평가 받으며, 단편 중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문명과 야만, 인간성의 어둠을 파헤진 조지프 콘래드의 대표작인 이 소설의 제목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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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 : 어둠의 심장)

 

조셉 콘래드 자신의 1890년 아프리카 여행 경험을 토대로 쓴 『어둠의 심장』은 콘래드의 단편 중 단연 최고이자, 모든 작품을 통틀어도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유려하고, 대담하고, 실험적이고, 퇴행적이며, 풍자적이고, 그러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이 작품은 1899년 첫 연재부터 끊임없는 논란과 분석의 대상이었다. “작품을 넘나드는” 주인공 찰스 말로우는 (말로우는 『청춘』과 『로드 짐』, 『기회』에도 등장한다) 그의 영국인 친구들에게 중앙 아프리카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가 다녀온 “콩고 자유국”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다.

말로우는 아프리카 대륙을 포격하는 프랑스 군함, 흑인 노예들에 대한 잔인한 처우, 상아로 한몫 잡으려는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탐욕 등 그곳에서 목격한 부조리와 참상을 회상한다. 말로우는 명민하고 이상주의적인 유럽인 쿠르츠를 만나기를 고대하지만, 죽어가는 쿠르츠를 찾았을 때, 이미 그는 타락하여 미쳐있었다. 야만의 화신이 된 쿠르츠는 아프리카인들을 가리키며 “저 야만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라고 고함을 지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둠의 심장”이 단순히 “검은 대륙”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둠의 심장”은 쿠르츠의 타락한 심장이자, 유럽 제국주의의 심장이다. “유럽의 모든 것이 쿠르츠를 만들어냈으며,” 런던은 그 음침한 암울함의 심장이다.

제국주의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대에 쓰여진 이 뛰어난 반제국주의적, 반인종주의적 소설은 사상과 기술의 도전적인 혁신가였던 콘래드의 정점을 보여준다. 『어둠의 심장』은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영화 『지옥의 묵시록』 등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미술

5. 이 미술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330년부터 시작되어 터키의 오토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1453년까지 동방 기독교 사회에서 전개된 예술품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크리스트교 예술, 건축의 내부 벽화를 모자이크 기법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인 이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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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비잔틴 미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330년부터 시작되어 터키의 오토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1453년까지 동방 기독교 사회에서 전개된 미술. 비잔틴은 콘스탄티노플의 옛이름 ‘비잔티온Byzantion’에서 나온 말로서 16세기 역사가들은 동로마 제국의 문화나 미술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다. 비잔틴 미술은 고대 로마 미술 및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에 고대 아시아, 더 나아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이 가미된 것이다.

비잔틴 제국은 장장 11세기 동안 존속하면서 처음에는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7세기 이후 점차 영토를 잃어갔다. 그러나 비잔틴 미술은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그 예술적 전통이 지속되었으며 러시아 등 슬라브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비잔틴 미술은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527~565)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던 때에 절정에 달하였는데 로마 제국을 재건하여 비잔틴의 영광과 위대성을 찬미하는데 역점이 주어졌다.

두번째 황금기는 마케도니아의 여러 황제들이 통치하던 시기(867~1057)였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고 불렸던 당시에는 이슬람 예술의 소재가 풍미하였으며 고대의 유물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수용되었다. 11세기 중엽부터 서유럽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갔고 비잔틴에 대한 유럽 측의 공격도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쇠퇴하기는 커녕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으며, 바로 이 세번째 전성기가 비잔틴 르네상스 시기이다. 이 무렵 비잔틴의 국력은 최악에 달하였지만 예술은 오히려 베네치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

비잔틴 미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강한 종교적 색채이다. 공예와 모자이크화, 세속적인 그림 등 비종교적인 미술도 있었지만, 이는 기독교 미술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자유보다는 정통 교리와 교회의 강령에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비잔틴 미술은 신학적이었다.

즉 비잔틴 미술은 신학자들의 사상과 종교회의의 결정 사항들을 신자들에게 미술의 언어로써 가르치고 유포하기 위한 사명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비잔틴 미술은 익명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자연히 미술가의 역할은 사제의 그것과 유사하게 되었으며 교훈보다는 예배적인 기능이 더 강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비잔틴의 신학적인 미술은 본질적으로 중세 서양의 교훈적인 미술과는 차이가 있다.

비잔틴 미술 중 건축의 유적은 콘스탄티노플에만 남아 있으며 고대의 시공법을 채용한 절충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교회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4~6세기에는 거대한 바실리카가 그리스와 로마 지역권에서 제작되었다. 6세기 이후 비잔틴 건축은 벽돌과 둥근 천장, 돔을 사용하였으며 천장은 궁륭 양식이 선호되었다. 성당 건축은 종교의식을 위한 기능적인 요소와 신의 집이라는 강한 상징성을 동시에 보유하였다. 바실리카식 구조에서 애프스의 반원개(半圓蓋)와 집중식 구조에서의 원개는 신의 좌(座)로서 성스러운 천계를 상징한다. 콘스탄티노플에 소재한 소피아 성당은 당시 비잔틴 제국의 기술과 재력을 총결집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한편 건축을 장식하기 위하여 주두나 원주, 코니스 등에는 평면적인 부조가 조각되었다. 그러나 인물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으며, 성수(聖樹), 사자, 기하학 무늬 등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문양 뿐이었다. 이에 비해 색채에 의한 벽면 장식은 성상(聖像)이 주를 이루며 예수나 성모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구도가 성당의 사방 벽면과 천장을 가득 채웠다. 소재로는 색유리를 사용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모자이크는 대형 기념물에 자주 사용되었고 프레스코화는 비잔틴 말기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비잔틴 미술에서 화려한 색채는 현세를 초월하는 비물질적인 영적 세계를 가시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비잔틴 미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성상(聖像)의 표현이 예배 대상으로 될 수 있느냐의 여부와 관련된 우상파괴 논쟁이었다. 성상을 부정하는 움직임은 특히 8~9세기 성상파괴주의 시대에 절정에 달하였고 숱한 기념물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성상을 긍정할 때조차도 삼차원의 실제성 부여가 완강히 거부되었기 때문에 비잔틴 미술은 환조적인 성상 대신에 이콘의 발달을 보았던 것이다.

비잔틴의 도상은 고대 알렉산더 시대의 미술에서 차용하여 거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가하였다. 신자들을 교육하고 경전에 대한 시각적인 해설을 위해 신약과 구약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사본 삽화들이 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즈음 비잔틴 제국은 퇴조하고 있었지만 비잔틴 미술은 오히려 서유럽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도상과 더불어 그 양식도 자유분방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차차 변해 갔다.

한편 비잔틴의 공예는 제국의 궁정과 귀족들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하였다. 특히 상아로 제작된 인물상이 성당 장식품으로 유명했고, 금은 보석의 세공품과 칠보 제품도 애호되었다. 이외에도 모직물, 동방풍의 주단, 수예품은 비잔틴의 특산물로 손꼽혔다. 비잔틴 미술은 서구의 기독교 미술의 형성, 특히 건축과 도상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을뿐만 아니라 발칸으로부터 슬라브 지역으로 퍼져나가 세르비아, 러시아 등지의 기독교 미술을 개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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