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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모음/지뽐 퀴즈

[012] 지적 허세 뽐내기 좋은 퀴즈 모음(난이도 있는 상식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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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1. 이 문학 작품은 러시아 대문호 포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1866년에 출간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최초의 20세기 소설이라 평가하고 있다. 살인, 죄책감, 소외, 구원에 관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이어지는 20세기의 여러 근대주의자들과 실존주의 작품들의 초석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문학과 영화속에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이 작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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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죄와 벌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가정의 불화와 경제적 어려움 등 극심한 괴로움과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집필된 것이다. 가난한 학생인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선택된 강자는 인류를 위해 사회의 도덕률 위에 선다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자인 이웃집 노인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러던 중 자기 희생과 고뇌의 삶을 사는 창녀 소냐를 만난 후 정신적으로 감화되면서 마침내 자수하고 시베리아 유형의 길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기독교적인 사랑과 인종(忍從)사상을 지니게 되는 사상의 변화과정을 납득시키고, 서구적 합리주의를 죄를 처단하려는 의도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하나 <죄와 벌>은 이러한 의도를 넘어서서 그 당시 단절된 사회 속에서 미해결된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호소하는 인도주의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음악#인물

2. 이 인물은 러시아의 작곡가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를 지내다가 40년간 창작에 전념하여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을 가져왔다. 교향곡, 오페라, 발레곡 이외에 다수의 실내악곡, 협주곡 등을 남겼으며 특히 발레곡 '백조의 호수',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 등이 유명하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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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Chaikovsky(Tchaikovsky))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립(帝立)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관리가 되었다가, 1860년 안톤 루빈시테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되면서 제1기생이 되었다. 그 뒤 모스크바음악원이 설립되자 교관이 되었으나(1866∼78), 77년 이전부터 러시아 철도왕(鐵道王)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1831∼94)으로부터 연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곧 교직을 떠나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 교향곡 제4, 5, 6의 3곡을 완성하고 93년 10월에는 제6교향곡을 완성 초연하였는데, 그날로부터 며칠 후인 11월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음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나 낭만파의 수법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악파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변박자(變拍子)와 민요의 사용도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고, 비조리성(非條理性)과 논리의 비약이 없어 서유럽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속류(俗流)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基點)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법상 피아노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콥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제음악적(標題音樂的)인 색채가 짙다. 무대음악은 별도로 하더라도, 교향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표제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 사상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1885)은 문학적 사고가 깊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도 푸시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파의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동시대의 증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1854년 14세 때의 《왈츠》에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 《비창》(작품 74)으로 끝났다. 작품 74는 자신이 붙인 번호이고, 그 후의 보주(補註)로 80, 이 밖에 번호 없는 초기의 소품이 약 20곡 현존한다. 즉 교향곡 6곡, 미완성의 교향곡 1곡, 교향시 1곡, 오페라 11곡, 발레곡 3곡 이외에도 다수의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및 협주곡 등이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를 그만 둔 시기(78)를 중심으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교직과 비평에 종사하였던 시기로 작품의 경향도 낭만적인 향취와 피아노협주곡 제1번(75)과 바이올린협주곡(78) 등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한 색채감을 지니고 있다.

후기는 제4번(77) 이후의 3곡의 교향곡, 그리고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Evgenii Onegin》(78)을 포함하여, 모두가 충실한 창조력과 기법의 완결을 상기시킨다. 이 두 시기 사이에는 그의 불행한 결혼문제가 개재되어 있어 그의 작풍변화의 중요 요인이 되고 있다.

교향곡 중에서는 전기의 것 중 제2번(1872)이 소러시아민요에서 취재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제4번 이후의 3곡의 교향곡들은 단일 모티프인 이른바 ‘숙명의 동기’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3곡을 일련의 곡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발레음악에서는 《백조의 호수:Swan Lake》(1876) 《잠자는 숲 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1889)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1892)의 3곡 중 특히 《백조의 호수》가 장대한 짜임새와 다채로운 음악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푸시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예브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의 여왕:The Queen of Spades》(1890)이 유명하다. 특히 전자는 러시아문학사에서 등장하는 ‘쓸모없는 사람’의 한 사람인 오네긴을 주인공으로 하여, 러시아적인 인간상의 애환을 깊이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그의 방대한 작품들 중에서 실내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곡의 현악4중주곡(1871, 74, 76)은 보로딘, 타네예프의 작품과 더불어 러시아악파의 훌륭한 소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저작으로 《화성학 개요》(1875)가 있다.


#경제

3. 이것은 상품거래소에서 행해지는 거래방법으로 장래 일정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매매할 것을 현재 시점에서 약정하는 거래로, 미래의 가치를 사고 파는 것이다. 이 거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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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선물거래(futures trading)

 

선물(futures)거래란 장래 일정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매매할 것을 현재 시점에서 약정하는 거래로, 미래의 가치를 사고 파는 것이다. 선물의 가치가 현물시장에서 운용되는 기초자산(채권, 외환, 주식 등)의 가격 변동에 의해 파생적으로 결정되는 파생상품(derivatives) 거래의 일종이다. 미리 정한 가격으로 매매를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가격변동 위험의 회피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위험회피를 목적으로 출발하였으나, 고도의 첨단금융기법을 이용, 위험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고수익 · 고위험 투자상품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도 1996년 5월 주가지수 선물시장을 개설한 데 이어 1999년 4월 23일 선물거래소가 부산에서 개장되었다.

1848년에 미국의 시카고에서 82명의 회원으로 시작된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인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Chicago Board of Trade)가 설립되어, 콩, 밀, 옥수수 등의 주요 농산물에 대해 선물계약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이때 거래된 농산물은 당시 세계 농산물 선물거래의 80%를 차지할 정도였다. 60년대 이후 세계경제환경이 급변하면서 금융변수들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수단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70년대 금융선물이 등장했다. 72년 미국의 시카고상업거래소(CME; Chicago Mercantile Exchange)에서 밀턴 프리드만 등 경제학자들의 자문을 통해 통화선물이 도입되었다. 그 후 73년에 개별주식옵션, 76년에 채권선물 등 각종 선물관련 금융상품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종교#인물

4. 이 인물의 이름은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이자 민족적 영웅이다. 주된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실려있다. 호렙산에서 노예로 있던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협력자 아론과 함께 그들을 구출하였으며,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40여 년 간 광야를 유랑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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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모세

 

구약성서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집필하거나 혹은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律法)은 ‘모세의 율법’이라 일컬어진다.

최근의 고고학적·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입국, 이집트 탈출, 야훼 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이 역사적 사실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실재성이 매우 높아졌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모세라는 인물을 람세스 2세 시대인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자 민족 영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활동한 정확한 시기나 그와 관련된 일들을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집트로 들어간 히브리 민족은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는 등 파라오의 박해를 받았다. 이스라엘 레위족 집안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모두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을 피하여 나일강에 버려졌는데, 다행히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40세 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유목민 미디안족(族)의 사제(司祭)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아 게르솜과 엘리에젤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다.

80세가 되던 해 호렙 산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신 야훼의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협력자인 형 아론과 함께 파라오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 파라오는 야훼의 열 가지 재앙을 받은 후에야 히브리 민족을 내어주고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갔다. 이어 시나이산에서 야훼에게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개자가 되었다(출애 20:1∼17, 신명 5:6∼21, 출애 34:14∼33).

그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지만,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모세는 야훼의 명에 의하여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예리고 맞은 편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향년 120세에 죽었다(신명 33 ·34장).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역사#인물

5. 이 인물은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이다. 오늘날의 독일에 세어진 왕국의 왕으로 서로마제국에 속했던 여러 지역을 처음으로 재통일하고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면서 지방봉건제도를 활용했고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카롤링거 전성기를 이룩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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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 샤를마뉴(Charlemagne) , 카를대제 또는 카롤루스대제

 

롤루스 대제(742~814)는 프랑크 국왕으로, 768년 부친인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칼만과 왕국을 공동 통치하다가 771년 칼만이 죽자 프랑크 왕국을 통일 지배하였다. 40여 년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 사방을 점령하여 대통일 사업을 성취하였으며, 772년부터 804년 사이에는 작센을 병합하고, 774년에는 교황의 청으로 북이탈리아 랑고바르트 왕국을 멸망시켜 이를 합병하였다. 778년 서쪽으로는 사라센 족을 토벌하여 에스파냐 변경 영토를 설치하였다. 또한 그 뒤에도 주변의 국가를 정복하여 거의 대부분의 게르만 족을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종교, 즉 프랑크 왕국과 그리스도교를 통합하였다. 이 밖에 이탈리아의 영토의 일부를 교황에 헌납하는 등 교회에 대한 봉사가 컸으므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800년 크리스마스에 서로마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다시 부활된 황제권과 교황권의 제휴로 피핀, 클로비스 이래의 과제였던 유럽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실현되었다. 또한 수도 아아헨에 궁정 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알퀴누스를 비롯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 사업을 장려하였으므로 카롤링 르네상스 문화가 번영하였다. 이 점에서 유럽을 형성하는 3대 문화 요소인 고전 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 정신은 카롤루스 대제가 통치하는 시기에 완전한 통합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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